경상북도 주민들은 발칵(?)할 소리겠지만 트레커들에게 울진은 '강원남도'로 통한다. 김명인 시인의 '너와집 한 채'에서 인용된 이 시구는 여행객들이 울진 왕피천을 떠올릴 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왕피천은 낙동정맥에서 뻗어 나온 준령 속에 깃든 하천이다. 경북도 산림 생태계의 중추이며 한반도 남쪽의 마지막 오지로 통한다,
왕피천은 말 그대로 '왕(王)이 피난(避)한 곳'이라는 뜻이다. 위기에 몰린 왕이 난을 피하여 찾은 곳이라면 최고의 은둔지였을 것이다.
왕이 찾았던 도피처가 지금은 천연 동식물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왕피천 환경보전지역엔 깊은 골, 청정 자연을 자양 삼아 20여 종의 멸종 위기 동식물이 군집, 번식하고 있다. 지난 5월 1일 1, 2구간이 완전 개통돼(3, 4구간은 준비 중) 일반인들을 맞아들이고 있다. 왕피천 물길을 따라 오지 탐험 신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전설 간직한 용소, 신비감 더해=왕피천 생태 탐방로는 전체 4개 구간으로 되어 있다. 1구간은 금강송으로 유명한 동소곡 주변. 2구간은 용소'속사 구간, 3'4구간은 야생동식물 관찰 코스로 준비 중인 수곡'하원지역이다.
대구를 출발한 지 3시간 만에 굴구지마을에 도착, 2구간 탐방길에 올랐다. 상천마을 초소에 들어서자 김순란 자연환경해설사가 반갑게 일행을 맞아준다.
데크를 벗어나 트레킹 코스에 접어든다. 금세 시원한 물소리가 소음에 찌든 귀를 씻어낸다.
30분 만에 첫 코스인 용소(龍沼)에 도착했다. 기암절벽 사이로 옥빛 물살이 시야를 간질이며 여행객을 맞아준다.
용소의 압권은 여의주를 문 '용의 입'이다. 용머리 하단 거대한 입속엔 어른 4, 5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공간이 있다. 곡류하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포토홀의 일종이다. 침식작용에 의한 자연현상이지만 전설과 설화를 담아내며 신비감을 키우고 있다.
용을 품었던 소(沼)인지라 물색은 검은색에 가깝고 소용돌이 또한 위협적이다. 짓궂은 탐방객들은 소에서 수영을 즐기기도 한다. 물살이 센 탓에 가끔씩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김순란 해설사는 "원래 이곳에서 수중 트레킹은 금지하고 있지만 강제조항이 아니라서 단속할 방법이 없다"며 "우기(雨期) 위험 수위만 아니면 입수를 허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반도 남부 최고의 생태 보고=용소를 지나 다시 상류 쪽으로 길을 들어섰다. 이 구간은 산길로 오르는 트레킹 코스다. 중간중간 벤치며 전망대가 정비돼 있어 쉬엄쉬엄 걷기에 좋다.
코스 중간에 금낭화 군락지, 갈대 생태숲이 등장해 여행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왕피천 생태'경관보전지역은 단일 지역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 과연 한반도 남부 최고 생태 보고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왕피천엔 산작약, 솔나리, 연잎꿩다리 등 멸종위기 식물 40여 종이 자생하고 있다. 산림엔 삵, 산양, 수달, 사향노루 등 희귀동물들이 인간의 간섭을 피해 자유롭게 종(種)을 번식하고 있다.
생태경관 보전지역을 가로지르는 왕피천은 회귀 어족의 산란 터로 유명하다. 1급수에만 산다는 버들치가 서식하고 은어, 황어, 연어가 계절을 바꿔가며 물살을 가른다.
길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혹시 산양과의 '즉석 만남' 이벤트를 기대했지만 산속에서 안식 중인지 여행객의 바람을 외면해 버렸다.
트레킹로는 수중 탐사로와 산길 탐사로가 번갈아 나타난다. 산이 강을 막으면 물은 휘돌아 물길을 내고 물이 산을 만나면 굽이쳐 흐르기도 한다.
변화무쌍한 산길을 40분쯤 진행하니 2코스 마지막 구간 속사마을이 나온다. 종점의 명소 거북바위, 학소대가 일행을 막아섰다.
학소대 코스는 하천의 상류로, 하류의 코스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이다. 아래 용소가 용이 용틀임하듯 동적(動的)인 분위기를 연출한다면 학소대는 학의 둥지에서 차분히 숨을 고르는 정적(靜的) 코스다. 용소에서 협곡 소용돌이의 기운에 위축됐던 트레커들은 학소대의 잔잔한 물결에 몸을 맡기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아마 정적(政敵)에게 쫓겨 다니느라 지쳐 있던 실직국 왕도 이곳에서 목을 축이며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속사지역이 왕피리를 직접 끼고 있으니 학소대 인근은 왕의 주요 도피로 중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후손들에게 값진 선물로 남겨야=삼한시대 한 소국 왕의 도피로였던 왕피천은 1천 년을 세월 속에 묻혀 있었다. 이 잠자는 원시림을 깨운 건 조선 후기 보부상들이었다. 보부상들의 등짐, 지게행렬을 따라 해안의 수산물이 경북 내륙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아직 왕피천엔 우마차 한 대 들어갈 수 없다.
울진 주민들도 이런 전통을 긍지로 여기고 있다. 최근 인근에 댐 건설 계획이 검토되었을 때 '댐 반대'로 주민들의 의견이 쉽게 모아진 것은 이런 정서들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길 뚫고 포장을 해서 가치를 높이는 곳이 있다면 '방치'만으로 그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곳도 있다. 왕피천은 명백히 후자에 가깝다. 1천 년 전 실직국 왕의 피난처는 현대인들의 휴양처로 절실하기 때문이다.
▶예약하고 가세요=울진군은 생태보전과 탐방객들의 안전을 위해 '왕피천계곡 에코사업단'을 운영하고 있다. '왕피천 생태관광 이야기' 홈페이지(www.wangpiecotour.com)를 통해 예약을 받고 있다. 2구간은 하루 80명으로 예약이 제한되며 오전 9시 굴구지산촌마을 펜션 앞에서 출발한다. 054)781-8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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