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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맹의 시와함께] 환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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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절기

-박준(1983~ )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膿)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전문.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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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다른 시에서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그 슬픔은 세상을 버티는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픔은 이론이 아니고 낭만도 아니므로 슬픔은 슬프고, 정말 많이 아프다. 슬픔을 자랑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시간에 의해 슬픔이 마모되고 흰 자국만을 등 뒤에 남겼을 때다. 그래서 시에서처럼 뱃사람들이 지나온 배의 흰 자국을 통해 삶의 풍경을 기억하게 되듯, 현재의 제일 마지막 모서리에 섰을 때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가장 뒤에 서 보지 않으면 우리는 삶의 전모를 알 수가 없다. 철이 지나갈 무렵 가장 못생기고 흠집 많은 과일들이 가난한 이들의 입속으로 들어가듯 가장 뒤에 같이 서 있어준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위로일 것이다.

이 시는 사랑에 대한 시다. 손발이 차갑고, 쉽게 착각하거나 잘 우기고, 음식 먹을 때 조심성 없는 그 사람. 그런데 시인은 그 사람과 보낸 절기들을 되새기면서 그 장면들을 축농(蓄膿)과 같다는 낯선 표현을 하였다. 축농은 우리가 축농증이라고 쓸 때와 같이 고름이 고여 있는 상태를 말한다. 왜 사랑이 고름이 고인 것처럼 되었을까? 고름은 고통과 투쟁과 그 시간의 축적물이다. 그 축적물은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머리 아프게 하고 숨 막히게 한다. 환절기. 겨울이 오는 길목, 가을의 끝에서 시인은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한다. 지독한 사랑, 지독한 이별이었을 것이다. 지난 시간은 그렇게 썩어서 고여 있다. 그 사랑의 끝에 서서야 우리는 사랑의 전모를 본다. 사랑, 그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기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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