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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섭 전 국회의장 '귀천'…할 말 다한 8선 정치 원로

대구 대륜고 출신 '강골' 정치인, 18일 국회장으로 영결식

두 차례 국회의장을 지낸 이만섭 전 의원이 14일 오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고인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거쳐 지난 1963년 제6대 총선에서 31세, 당시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한 뒤 8선을 기록했다. 특히 제14대, 제16대 국회의장을 지낸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 원로다.

대구 출신인 고인은 대륜고를 나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언론계에 투신했다. 이 전 의장은 언론인 시절 권력 핵심부의 눈에 거슬리는 기사를 써 필화로 구속되기도 했지만, 그 인연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발탁돼 정계에 입문했다. 정치인으로서 누구보다 화려한 이력을 가졌지만 남다른 '강골' 기질 탓에 정치적 굴곡도 심했다.

제7대 의원 시절인 지난 1969년에는 3선 개헌 반대투쟁에 앞장서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이후락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해임을 요구했다가 약 8년간 정치활동의 공백기를 맞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제13대 때는 지역구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들기도 했으나 제14대 민자당 전국구로 다시 원내로 돌아와 국회의장 자리에 올랐다.

1993년 당시 박준규 국회의장이 재산공개 파동으로 낙마하자 그 뒤를 이어 1년 2개월간 입법부 수장을 맡았다. 또 그해 12월 통합선거법 등의 날치기 사회를 거부,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남다른 '뚝심으로 여야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1997년에는 신한국당 대표서리로 이회창 총재를 대선후보로 선출하는 전당대회를 치렀으나 당내 대선후보 경선 결과에 불복, 탈당한 이인제 후보를 지원해 전국구 의원직을 버리고 국민신당에 합류하는 정치 모험을 강행하기도 했다. 이후 이인제 후보의 대선 패배 뒤 거취를 놓고 고민하다 1998년 6명의 국민신당 의원을 거느리고 여당인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1999년 7월 특검제 도입을 둘러싼 국민회의-자민련 지도부 간 갈등 수습 국면에서 총재권한대행에 임명된 뒤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소속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된 16대 국회에서는 두 번째 국회의장을 지냈다. 5공 당시 국민당 총재와 1997년 대선 이후 국민신당 총재 시절을 제외하고 줄곧 여당생활만 했다는 점에서 일부 비판적 평가도 있지만 꼿꼿하고 바른말 잘하는' 원로 정치인이라는 평가가 앞선다.

이 전 의장의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으며 영결식은 18일 국회장으로 치러질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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