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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의 목적에서,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엔진의 시대』

미국의 첫 국민차이며 대량 생산된 포드의 '모델T'
미국의 첫 국민차이며 대량 생산된 포드의 '모델T'

엔진의 시대/ 폴 인그래시아 지음/ 정병선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현대 미국 사회를 변화시킨 자동차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현대 문명의 심장부에 있는 미국을 움직였으니 그동안 세계 또한 뒤흔든 차들이라고 봐도 되겠다. 저자는 '자동차통'이다. 25년 넘게 자동차 산업 분야를 취재했고 제너럴 모터스의 경영 위기에 대한 심층 르포로 1993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폴 인그래시아' 로이터 편집국장이다.

저자는 현대를 읽을 수 있는 가장 상징적인 차 15대를 선정했다. 가장 비싼 차, 가장 빠른 차, 가장 유명한 차를 고른 게 아니다. 미국인의 삶과 사고방식을 바꾼 차들로 구성했다.

포드의 '모델T'는 인류에게 내 차(자가용) 시대를 열어 준 차다. 1908년부터 생산된 이 차는 처음에는 850달러였던 것이 260달러까지 값이 내려갔다. 포드가 컨베이어 벨트로 상징되는 대량 생산 시스템을 갖췄기 때문이다. 모델T를 가진 덕분에 시골 사람들은 도시를 자주 드나들었고 아빠들은 가족과 교외로 자주 나갔다. 요즘의 페이스북 같은 SNS처럼 모델T는 100년 전 사회생활 관계망을 바꿨다.

단순하고 실용적인 모델T는 20년간 도로를 지배하다 1927년 단종됐다. 모델T의 빈자리는 같은 해에 출시된 화려하고 허세 가득한 '라살'이 이어받았다. 차가 운송수단에 그치지 않고 자기표현 수단으로도 인식되기 시작한 때였다.

두 모델이 후대에 끼친 영향은 컸다. 미국 자동차 시장은 크게 모델T처럼 실용적이거나 라살처럼 과시용인 차들로 나뉘게 됐다. 물론 픽업트럭처럼 원래 용도는 이동 및 운반이지만 점차 남자들의 로망이 투영되며 과시용 목적이 더해진 경우도 있다. 저자는 카우보이, 컨트리 음악, 공화당 지지자를 상징하며 현재 미국의 이미지를 잘 나타내는 픽업트럭 중 하나로 포드의 'F-' 시리즈를 꼽는다.

어쨌든 다시 과거로 돌아가 보면, 미국 최초의 스포츠카이며 테일핀(자동차 꽁무니를 날개 모양으로 치켜세운 것)을 갖춘 '쉐보레 콜벳'이 1953년에 처음 나왔다. 이해에 한국전쟁은 휴전을 맞았다. 미국인들에게는 20여 년간 지속되던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등 온갖 전쟁이 막을 내린 시기였다. 승리에 도취된 미국인들은 풀어질 마음의 준비가 단단히 돼 있었고, 쉐보레 콜벳에 이어 1959년에는 사상 최대의 테일핀을 단 '캐딜락'이 출시됐다.

점점 크고 화려해지던 테일핀은 거품처럼 사라졌다. 실용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개를 들며 독일 국민차 폭스바겐의 '비틀'과 '마이크로버스'가 인기를 끌었다. 두 자동차는 1960년대 미국 히피들의 대항 문화를 상징하는 역할도 맡았다.

비틀에 맞서 제너럴 모터스가 내놓은 소형차 '쉐보레 콜베어'는 비틀은 잡지 못하고 다른 방향으로 역사를 썼다. 안전 결함 문제로 '법정 소송전'이라는 유산을 남겼다. 자동차 소비자들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눈을 크게 뜨기 시작했다.

1964년 동시에 출시된 '머스탱'과 '폰티액 GTO'는 젊은이들이 열광했던 차다. 당시는 소득이, 청년층 인구가, 그리고 차 2대를 가진 가정이 급증하던 때였다. 젊은이들이 자동차 회사의 주요 타깃이 됐다.

좋은 시절도 오래는 못 갔다. 1970년대 들어 석유 파동으로 휘발유값이 뛰고 대기오염방지법도 제정됐다. 차의 몸집을 줄이는 작업이 필요했다. 미국의 자동차 회사들이 쩔쩔매는 사이 일본의 혼다가 미국 곳곳에 공장을 세워 시장을 이끌었다. 내놓은 대표적인 차가 '어코드'다. 다시 일본 차에 대적해 크라이슬러의 '미니밴'이 가족용 소형 밴으로 각광을 받았다. 반면 여전히 화려한 생활을 위한 차가 필요했던 여피(도시의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의 욕망은 'BMW3' 시리즈가 채워줬다. 지금 한국만 봐도 유행을 넘어 스테디셀러가 된 SUV(스포츠 실용차)는 1980년대 미국에 첫 등장했다. 아메리칸모터스의 '지프' 체로키 모델이 시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지속 가능한 자동차의 시작'이라는 문구를 2000년 미국에 최초로 대량 판매된 하이브리드차, 도요타의 '프리우스'에 붙인다. 앞으로 엔진의 시대가 계속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이 숨어 있다며. 511쪽, 2만6천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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