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많은 여성이 독일군과 연인 관계를 맺었다. 일부는 자발적이었지만 상당수는 나치의 착취로 빚어진 식량 등 생필품 부족의 해결이 목적이었다. 나치가 물러간 뒤 '콜라보'(collabo, collaboration의 줄임말로 '협력자'란 뜻의 경멸적 호칭)로 불린 이들은 집단적 보복을 받았다. 온몸에 타르가 칠해지고 머리가 깎인 채 조리돌림을 당하는 것은 물론 살해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1944년 한 해에만 2천 명의 여성이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독일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나치가 패망하면서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 여성과 같은 처지가 됐지만 그들은 더 비참했다. 이들이 성(性)을 제공하고 받은 대가는 돈 몇 푼과 음식, 담배가 고작이었다. 베를린에서는 이런 여성을 '폐허의 생쥐'라고 불렀다. 먹을 것을 주는 연합국 군인을 찾아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난민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이 점령한 동유럽을 소련이 다시 점령하면서 수많은 독일계 주민이 서쪽으로 달아났다. 소련군의 무차별 보복 때문이었다. 하지만 철도와 도로는 파괴됐고 탈것도 없어서 많은 난민이 소련군 점령 지역에 갇혔다. 이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굶어 죽거나 자신이 가진 것 중 상대방이 가치있게 여기는 그 무엇과 식량을 바꾸는 것뿐이었다. 난민 여성에게 그것은 성이었다. 나이는 상관없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고향으로 소련에 점령된 뒤 칼리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뀐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의 한 의사의 회고는 그 불의(不義)한 참상을 이렇게 전한다.
"무리에는 어린이 세 명도 있었는데…그들이 마지막으로 먹은 것은 잠시 멈춰 있던 러시아 트럭에서 가져온 감자 몇 알이었다. 감자를 무슨 값으로 치렀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는 것으로 봐서 이번에도 여자들이 값을 치른 게 분명했다. 오! 신이시여! 어떤 자가 이런 귀신처럼 보이는 여성에게서 아직도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0년' 이안 부루마)
내전과 가난을 피해 유럽으로 가려는 여성 난민들이 성매매에 내몰리고 있다고 한다. 난민 밀매업자들이 유럽행 버스나 선박을 더 빨리 태워준다는 조건으로 성매매를 강요하고, 72시간 안에 경유 국가를 떠나야 하는 규정 때문에 난민 여성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인간의 사악한 본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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