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요령부득<要領不得> 사회

이건 분명 중독이다.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으니 말이다. 안개와 노을을 사랑하는 마음이 병이 됐다는 연하고질(煙霞痼疾)이라면 좋으련만. 그렇다고 운동 중독이나 활자 중독에 빠질 위인도 못 된다. '몸짱'이나 '뇌섹남'이 되기에는 천성이 게으르다.

정신줄을 놓아버린 늪은 모바일 퍼즐 게임이다. 가로 4줄 세로 4줄, 16칸 안에서 숫자를 더해 더 큰 숫자를 만들어 나가는 '2048'이다. 더하기만 할 줄 알면 돼, 아내가 '유딩'(유치원생)용이라고 놀리는 오락이다.

처음에는 머리나 식히자는 가벼운 마음에 시작했다. 하지만 간단한 룰만큼 쉽지는 않았다. 'Game Over'가 뜰 때마다 굳어버린 머리를 원망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놈의 승부욕이 컴퓨터게임과 담을 쌓고 살아온 스스로를 서서히 중독 시켜 갔다. 충동을 조절하는 뇌 전두엽이 이미 손상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친김에 인터넷을 뒤지니 고득점 비법을 알려주는 글이 수두룩하다. 점수가 오르면서, 역시 세상일에는 '노오오오력'만으로는 안 되는 게 많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초보의 미천한 실력이 알파고(AlphaGo) 수준의 지능이 없어서가 아니라고도 우겨본다.

사실 우리 사회는 '어마무시'한 요령의 고수들로 득실댄다. 비상장 주식을 출처가 불분명한 돈으로 사들여 126억원의 부당이득을 올린 검사장, 전관임을 내세워 재판부 로비 명목으로 건당 50억원의 수임료를 챙긴 변호사는 귀재들이다. 이들에 비하면 정부청사에 몰래 들어가 공무원 선발시험 성적을 조작한 취업준비생은 오히려 가엾다.

또 부실 운영으로 회사가 망해가는 상황에서 손실을 보지 않으려고 보유 주식을 미리 팔아치운 대기업 오너는 어떤가. 남이 그려준 그림에 덧칠만 조금 보태 자신의 작품이라고 발표했다는 연예인은 어떤가. 자신의 기억을 믿을 수 없다는 말로 표절 논란을 비켜가려 한 베스트셀러 작가는 어떤가. 이들의 혐의가 사실로 드러난다면, '태양의 후예' 유시진 대위는 "이건 요령이 아니라 사기이지 말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을까.

상식에 대한 배신을 이야기한다면, 스스로 '양아치도 이런 양아치가 없다'고 떠드는 정치권을 빼놓을 수 없다. 선거 뒤에도 석고대죄는커녕 감투싸움에만 몰두하는 꼬락서니가 가증스럽다. 애당초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4년이 두렵기만 하다. 진정, 정치인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국민에게 손가락질을 받기 위해서인가?

지난 한 달 행보로 보면 이번 총선으로 금배지를 처음 단 초선 의원이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대한민국 '갑(甲) 오브 갑'으로 권력을 누릴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는 듯하다. 초선 연찬회 참석을 위해 국회 안마당 300m를 버스 타고 이동하고, 2층 올라가려고 1층에 엘리베이터 3대를 붙잡아두는 사람들이 '국민의 일꾼'을 자처해서는 안 된다.

20대 국회 300명의 의원 모두를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왜 정치를 하느냐'는 질문에 확고한 철학을 보여줄 이가 드물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안다. 하버드 경영대 교수 출신인 존 스비오클라가 '억만장자 효과'란 저서에서 퍼포머(performer)라고 부른 전문가 집단이 대다수인 탓이다. 이들은 기존에 구축된 체제 안에서 최적화에 능한 인재들이지만 획기적 가치를 창출하지는 못한다. 자신의 입신영달 외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이들이 남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신경 쓸 리 만무하다. 요령이 너무 넘쳐 오히려 요령부득(要領不得)인 사회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퇴고를 하다 스마트폰을 켜고 다시 '2048'을 노려본다. 인터넷에서 배운 요령을 그대로 실천해 고수의 반열에 올라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꾼다. 하지만 이내 실수 연발이다. 낡은 스마트폰의 그래픽마저 버벅댄다. 아! 역시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인가 보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