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소에서 떨었다
우리 집 사랑방에는 여러 어른이 놀았어.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기에 아버지는 나를 늘 끼고 돌았지. 내가 태어난 지 다섯 달이 채 안 되어 엄마가 돌아가셨으니까. 아버지는 젖동냥하여 나를 키웠어. 우리 집에 염소를 길렀대. 배고파 울 때면 아버지는 염소 젖을 먹였다더군. 나에게 쏟은 아버지의 애정은 극진했어.
"어릴 적, 엄마 없이 어떻게 살았나요?"
"엄마 죽고 몇 해 지나 새엄마를 맞이했어. 다른 것은 기억에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생각나. 새엄마가 들어올 때 의붓동생을 데리고 왔지. 의붓동생이 이불에 오줌 싼 것을 내가 쌌다고 덮어씌우더군. 무척 억울했어. 잘해준 것은 쉬 잊히지만, 섭섭한 것은 오래 남더라고. 사건 이야기한다는 게 딴 방향으로 흘렀네. 놈들이 들이닥쳐 아버지와 어른들을 모두 끌고 나갔어." 그때 박상춘 어른이 "영곤이를 큰방에 데려다 놓고 가겠다"며 나를 안고 변소에 숨었어. 그 어른은 심상찮은 분위기를 간파하고 기지를 발휘한 것 같아. 아버지와 여러 사람이 공비들 칼에 죽었지만, 상춘 어른은 살았어.
"너 때문에 살았다"고 나를 잘 보살펴 주었어.
"오랫동안 변소에 머물러 있었나요?"
"바로 나왔지. 놈들이 위채에 불을 질렀으니까. 불길이 활활 타올랐지만, 손을 쓸 여유가 없었어. 마구간에는 황소가 있었지. 이까리를 아무리 당겨도 나오지 않는 거야. 소는 타 죽었어. 큰 누나가 나를 데리고 박동국 댁 담을 넘어 큰집으로 도망쳤지. 가는 동안 동네는 불바다였어. 아버지를 어떻게 장례 치렀는지 더는 생각나는 것이 없어. 겁에 질려 떨었다는 것밖에. 할배가 돌아가시고 열여섯 살 되던 해, 계당동에 있는 외가에 얹혀살다 군에 갔어."
# 29. 사망자 이말천 41세. 장남 이영곤 8세. 대구시 중동
그녀의 뒷모습이 애처로웠어
사망자에게는 직계 후손이 없어 그의 친척뻘인 이일우를 만나 경위를 들었다. 그는 명문 대학을 거치면서 문학적 소양과 다양한 취미를 갖췄다. 중학교 시절부터 예술에 조예가 깊어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박사리를 중심으로 이웃 마을 학생과 청년들을 모아 대동초등학교에 연극 무대를 만들어 공연도 했다. 한때는 배우 도금봉과 더불어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었다. 서재에는 고풍이 물씬 풍기는 역사의 흔적들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사건이 터진 날은 대구에 있었지. 중학교 3학년이었어. 직접 겪지 않았으니 자세한 것은 몰라. 돌아가신 그분은 먼 친척 할아버지뻘이야. 한육만 씨 집 뒤에서 공비들이 쏜 총과 휘두른 칼날에 무참히 당했어. 주말마다 시골집에 오면 돌아가신 분의 부인과 딸을 가끔 보았어. 집마저 소실되어 오갈 데 없는 부인과 어린 딸을 2년 가까이 아버지가 보살폈지. 어린 딸마저 홍역으로 죽고 부인은 재혼했어. 할아버지께 양자를 세워 족보에 올렸지만, 아들 구실을 제대로 못 해. 가마골에 쓴 묏자리가 고속도로에 편입되어 묘를 옮겼어."
박사 사건이 일어난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 시대에 이일우가 보고 느낀 이야기다.
"6'2전쟁 때 공산군이 안동을 거쳐 의성에 진입할 시점이었다. 국군이 우리 집 아래채를 비워내라고 했다.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북진할 때까지 주둔했다. 보안사 요원들은 불순분자를 색출, 조사했다. 어디선가 잡혀 온 여성에게 닦달했지만,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얼굴에 수건을 씌워놓고 공포까지 쐈지만. 보안사는 결국 그녀를 돌려보냈다. 무혐의인지, 아니면 투철한 이념의 승리인지 모를 일이다. 파김치가 되어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애처로웠다."
# 30. 사망자 이춘택 33세. 친척 이일우 17세
아버지는 일류 미장공이었어
저녁 8시쯤 됐을 거야. 내 생각으로는 공비들이 우리 집에 맨 먼저 들이닥쳤던 것 같아. 아마 네댓 명 됐을 거야. 우리 가족을 모두 밖으로 내몰더니 바로 불을 질렀어. 어머니는 불을 끈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지만, 불길을 막을 수 없었어. 남동생은 연기를 많이 마셔 숨을 제대로 못 쉬고, 고랑거리다 죽었어. 아버지를 논 마당에 꿇어 앉히더군. 아버지는 위험을 느꼈는지 약 50m 정도 도망치다 그들에게 다시 잡혔어.
어린 여동생은 어머니가 업고, 나는 남동생(성환, 5세)의 손목을 잡고 라일만 씨 사과나무 아래 숨었어. 날씨가 얼마나 춥던지, 얼어 죽는 줄 알았어. 이내 단지 터지는 소리, 소 울음이 그곳까지 들려오더군. 빨갱이들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새벽에 집에 돌아왔어. 아버지의 시신을 큰집에 모셔놓았더군. 집은 완전히 타 버렸지만, 나락 두지는 덜 탔어. 쌀에서 나는 화근내 때문에 도저히 밥을 먹을 수 없더라고.
나중에 군경이 공비를 소탕하고 한 놈을 생포했는데 열대여섯 살 정도로 보였어. 아버지를 죽인 원수였지만, 막상 공개 처형하는 것을 직접 보니 마음이 짠하더라고. 그 현장에서 원수를 갈아 먹겠다며 울부짖던 몇몇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해. 엄마의 마음도 똑같았을 거야.
"그동안 생활은 어떻게 했는지요?"
"아버지는 일본에서 미장기술을 배워 일류 미장공이었어. 인근에 집을 짓는 곳마다 불려다녔지. 돈을 상당히 많이 벌었어. 아버지가 살았으면 알부자 소리 들었을 낀데."
# 31. 사망자 정만석 41세. 아들 정두환 8세. 대구 신천동
일찍 수술만 했더라도
어려서 생각이 별로 안 나. 우리 집도 불타고, 마을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어. 여기저기서 울부짖는 소리와 불 끄는 광경 정도만 아슴푸레해. 상처를 입고 도립병원에 이송된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었어. 사망자 38명 중 37명의 제삿날이 같지만, 우리 아버지는 하루 늦지. 아버지는 외상이 크게 없었던 모양이야. 상처가 큰 사람부터 치료하다 보니 아버지의 수술이 뒤로 밀렸어. 제때 손을 쓰지 못해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 아버지는 목에 칼을 맞은 삼촌과 친구의 상처가 위중하니 그들부터 먼저 치료해 달라고 의사에게 부탁했대.
요즘 같은 세상에 생각할 수 없는 살신성인의 모습이다. 아들 최재현은 기억의 한계가 있어 희생자의 동생, 최영환에게 그날의 상황을 자세히 들었다.
동생 최영환의 이야기다.
"형님은 사랑방에 놀러 나가고 나는 아버지, 형수, 조카 둘과 집에 있었지. 밖이 시끌벅적하고, 개 짖는 소리가 요란했어."
"마을에 개가 많았군요?"
"그때는 집집이 개를 길렀어. 놈들이 내려오면 파수꾼 노릇을 했으니까. 시신이 즐비하다는 소문을 듣고 아버지와 나는 현장에 갔어. 그곳에 갔을 때는 이미 놈들의 작전이 끝나 있었어. 죽은 무리 중에는 형님이 없었어. 형님을 찾아 헤맸지. 형님은 현장 근처 숙모 댁에 누워 계시더군. 무명베로 상처 부위를 싸매고 있었어. 비보가 연방 날아들었어. 개미각단의 작은 형님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에 달려갔지. 쓰러져 있는 둘째 형님을 일으키는 순간 목이 앞으로 푹 수그러지더라고. 목이 달아날 정도로 깊게 팼어. 아버지와 나는 중상을 입은 두 분 형님과 함께 트럭을 타고 도립병원에 갔지. 큰 형님은 다음날 돌아가셨어. 사건 당일, 37명이 모두 죽었지만, 형님은 하루 뒤에 죽었어. 그래서 제사를 하루 늦게 지내잖아? 다른 사람들은 일손이 없어 묻기 바빴지만, 형님은 삼일장을 치렀어. 딴 분들은 가마니나 돗자리에 둘둘 말아 묻었지만, 형님은 상여를 꾸몄어. 나도 사랑방에 놀러 갔더라면 삼 형제가 모두 희생당했을 거야."
"큰 형님에게 갓난아기가 있었다고 하던데요?"
"있었지. 옥순이야. 난 지 꼭 한칠 되었어. 형수는 핏덩이를 업고 정신없이 불을 끄다 아이를 땅에 떨어뜨려 죽을 뻔했어. 조카는 허리가 안 좋아. 그때 다친 허리가 자주 도진다고 투덜대지."
최영환은 이듬해 6'25가 터졌을 때 형님들의 원수를 갚고자 자원입대했다고 진술했다. 돌아가신 두 형님을 생각하는지, 눈언저리에 물기가 번진다. 풀어놓은 이야기보따리는 밤이 새도록 이어질 것 같았다.
#32. 사망자 최명환 33세. 장남 최재현 4세
동생 최영환 18세. 부산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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