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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수상(隨想)] 가을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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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뒷길에는 은행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있다. 몇 해 전부터는 떨어진 은행잎을 쓸지 않고 추억이 포개어지듯 그냥 쌓이게 하여, 노란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포근하고 운치 있는 길이 돼 가을 타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다.

발끝에서 날아오르는 노란 추억을 다시금 추억하며 가을의 깊숙한 곳에서 가을을 느끼게 한다.

이영희의 노래 '가을 타는 여자' 가사 중에 '가슴 타는 날에 잠 못 들고 이리저리 뒤척인 것은 만지면 터질 것 같은 그리움으로 가을 타는 여자인가 봐' 이런 구절이 있다. 흔히들 봄은 여자의 계절이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 했지만, 이토록 곱게 물들어 가는 짙은 가을날에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가을을 타고 있는가 보다.

방랑시인 매월당이 "나에게 가을이 없었다면 방랑도 못했을 거다"라고 했듯이, 나는 언제나 단풍보다 먼저 마음이 붉게 물들고 모든 면에서 어지간히 채워졌다 생각을 하면서도 어디엔가 빈 것 같은 허전함에 젖어들어 가벼운 방랑을 해야 하는 명색이 가을 남자인 건 여전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어쩔 수 없이 가을 하늘에 그리는 수채화 같은 설렘보다는 지금처럼, 지금처럼만 하고 숙연함이 돋아나는 것은 자꾸자꾸 가을이 포개어진 때문일까.

싱싱하던 나뭇잎이 울긋불긋 물들고 그러다 떨어져 곱게 쌓이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운치 있고 우리의 가을,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만이 누릴 수 있는 이 가을의 표정이고 향내음이라 생각되지만, 비에 젖어 처박혀 있는 낙엽을 보면 가슴이 아린다.

여기에 내가 오십 대 중반에 썼던 졸시 '가을 남자'를 소개하며, 내 어깨에 살며시 마음을 기대는 한 잎 단풍 같은 누군가를 기다리던 그때의 감성에 오래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가을 남자

그대 숨 쉬는 창가에

한 다발 국화꽃으로 꽂히고 싶어

향 맑은 스킨으로

토닥토닥 얼굴을 두드리며

나는 설레고 있다

그대 안에 고인 가을빛을

휘감고 흐르는 강물이고 싶어

남겨진 추억 몇 개 다시 챙겨

나는 가을 속으로 간다

내가 가을바람으로 출렁이면

하얗게 쓰러지는 망초꽃처럼

내 어깨에 살며시 마음을 기대는

한 잎 단풍 같은

가을 여자를 기다리는 나는

가을 속에 깊숙이 서 있는 가을 남자

마음이 먼저 붉게 물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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