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민이 에세이 산책] 갈려면 '갈아주세요'

지난해였던 것 같다. 대구 동성로와 삼덕동의 공사장 펜스에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낙서를 그린 '범인'을 경찰이 쫓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대체 어떤 그림이기에 공사장 펜스에 A4 용지로 인쇄된 그림을 붙였다고 경찰이 쫓기 시작한 것일까?

나는 실제로 이 '낙서'를 보지 못했지만,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찾았다. '범인'은 박근혜 대통령 사진에다 눈에는 'please', 입에는 'grind'라는 문구를 붙여두었다. "Please grind", 직역하면 "갈아주세요"라는 말일 텐데 '범인'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참을 생각하다 나는 "갈아달라"는 말을 맥락에 따라서 땅을 파서 뒤집는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고, 직책이나 위치를 다른 사람으로 바꾼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Please grind"라는 말은 대통령 자신이 "뒤집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고, 이 '낙서' 작가가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대통령을 "바꿔주세요"라고 호소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범인'은 강력 접착제로 이 그림을 공공 시설물에 붙이고 뿌렸다는 이유로 재물손괴죄라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 '낙서'를 강력 본드로 붙인 '범인'은 이 작품의 완성을 경찰이나 구청 직원이 본드로 단단히 붙은 이 '낙서'를 벽에서 떼어 내기 위해 스크래퍼로 '갈아내서' 대통령의 얼굴이 엉망이 되어 버리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마치 복권을 긁어내듯 "갈아주세요"라고 적힌 파피에 콜레를 열심히 '긁고', '뒤집으면' 과연 그 얼굴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대통령의 탄력 있는 얼굴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자, 그러면 대통령의 얼굴을 모독하고, 감히 '용안'을 무엄하게 훼손한 자는 누구라고 해야 할까. 이 '낙서'를 그리고 붙인 '범인'일까? 아니면 이 '낙서'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대통령의 얼굴'을 갈아내고 스프레이를 뿌린 '공무원'일까?

국회가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를 결의하는 광경을 보면서 새삼 이 '낙서'가 생각났다. 국회의장이 탄핵 소추안 가결을 선포하는 순간 "갈아주세요"라는 말의 이중적 의미가 모두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갈려면 먼저 갈아내야 한다. 즉, 바꾸려면 뒤집어야 하는 법이다. 나는 그 순간 '뒤집어주세요'와 '바꿔주세요', 두 가지 의미의 "갈아주세요"가 하나로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하면 이것이 예술의 힘이다. 말하자면 예술이야말로 끊임없이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현실을 비판하여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해주는 힘을 준다. 그렇다면 이 '낙서'도 단지 낙서일 뿐이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예술의 힘으로 동성로에 임한 작은 '예언'이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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