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 주의 책] 고향 곁에 머무는 마음, 자이니치 경북인

열도 호령한 최배달·역도산…그 뒤엔 의성 '오야붕' 있었다

고향 곁에 머무는 마음, 자이니치 경북인/ 인문사회연구소, 이정화 지음/ 코뮤니타스 펴냄

경상북도와 (사)인문사회연구소의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6-일본 편'의 성과를 기록한 책이다. 경상북도 출신 자이니치(재일:在日의 일본식 발음)들의 파란만장한 이주사, 경계인으로 살며 느낀 고됨과 비애, 그럼에도 잊지 않고 모국을 향해 쏟아낸 공헌의 역사가 담겨 있다. 재일동포 89만 명 중 경북에 뿌리를 둔 사람은 18만 명으로 20%에 달한다. 1세대부터 6세대까지 있다. 이들은 일본 7개 지역에 경북도민회를 조직해 활동하며 경북인의 정체성을 지켜오고 있다.

책을 여는 인물은 1세대 권외남(1927년생, 안동 출신, 오카야마 거주) 할머니다. 권외남 할머니는 경북 출신 재일동포들의 생애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신동호 인문사회연구소 소장은 "권외남 할머니는 한국에 살 때 쓰던 경상도 말의 원형을 기가 막히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떠올렸다. 이정화 작가는 "그러면서도 권외남 할머니가 처음 만나 한 말 '이말 저말(조선말과 일본말) 다 안 된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경계인으로 사는 재일동포들의 처지를 함축하고 있어서였다"고 설명했다. 권외남 할머니가 남편을 따라 일본으로 와 살다 1년 정도 지났을 때쯤 조국은 광복을 맞았다. 그때 돌아가려 했지만 남편이 노름으로 뱃삯을 모두 날려버렸고, 남편은 빈손으로는 절대로 고향에 갈 수 없다며 귀국선을 그냥 떠나보냈다. 이후 먹고살기 위해 권외남 씨는 낮에는 활성탄공장에 다니고 밤에는 공장 근처 식당에서 일도 했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살다 보니 60년이 흘렀다.

전후 일본도 산업화 시기를 맞았고, 이를 기회 삼아 경북 출신 재일동포들은 부지런히 일했다. 다만 차별 때문에 밑바닥부터 밟아야 했다. 쇠가 돈이 되던 시절이었다. 박재길(1943년생, 청도 출신, 오사카 거주) 씨의 아버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스끄라푸, 즉 길거리에서 폐철을 줍는 일을 했다. 그러다 병까지 얻은 아버지는 고향에 가서 죽겠다며 박 씨가 중학생 때 한국으로 떠났고, 박 씨는 쇠를 만지는 형들을 도와 일했다. 결국 박 씨는 값나가는 쇠를 만지는, 정밀가공을 하는 이하라공업사를 운영하는 꽤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차헌소(1945년생, 의성 출신, 히메지 거주) 씨도 1960년대부터 아버지와 함께 고철을 모아 파는 일을 했다. 그런데 차 씨는 아버지와 달리 불법입국자 신세였다. 6년간 '잠수함' 생활을 해야 했다. 단속을 피해 여기저기 도망을 다니면서도 철 장사는 했다. 결혼을 해야만 등록증을 준다는 말에 차 씨는 일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선을 보러 다녔다. 결국 1969년에 같은 재일동포와 결혼했고, 1년 뒤 첫딸을 낳고 자수를 하고서야 이듬해 등록증을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가난 말고도 힘겨운 것들은 재일동포들의 삶 주변 곳곳에 있었다.

재일동포들의 고난 이면에는 영화 같은 삶의 모습도 있다. 진동철(1919년생, 고령 출신, 도치기 거주) 씨의 별명은 '조비히게'였다. 사람들이 이름은 모르지만 조선인 대표로서 이런저런 사건을 해결해주는 '코 밑에 짧은 수염'(조비히게)을 가진 그를 그렇게 불렀다. 진 씨는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이 충돌할 때마다 나서서 거칠게 항의하다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진 씨는 어릴 적에 공부가 하기 싫어 만주로 도망갔다가 만주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일본으로 왔다. 일본에서 광산사업을 벌이고 고무, 양단, 광목, 보석, 자갈 등 다양한 물건을 다루는 장사를 하며 돈을 왕창 벌기도 또 빈털터리가 되기도 하는 등 풍운아의 삶을 살았다.

조규화(1927년생, 의성 출신, 도쿄 거주) 씨는 일본 야쿠자 사회의 원로급 인물이다. 새해가 되면 다른 야쿠자 조직의 '오야붕'(보스) 수십 명이 조 씨에게 문안인사를 올 정도다. 그동안 조 씨는 노점상을 하는 동포들을 돕고, 최배달'역도산'장훈 등 재일동포 운동선수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고향 의성도 잊지 않았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고향에 도로, 노인회관, 체육관을 지어주고 소도 실어 보냈다. 조 씨는 지금도 경북의성향우회장과 도쿄경북도민회 고문 등 고향 관련해 여러 직책을 맡고 있다.

조 씨 말고도 새마을운동 시기를 비롯해 88올림픽 개최 같은 좋은 일이 있을 때나 IMF 외환위기 같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또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조국을 위하는 마음으로 공헌한 경북 출신 재일동포들이 많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서복용(1926년생, 김천 출신) 씨는 1975년 경북관광개발공사에 당시로는 거액인 5만달러를 투자했다. 또 고향인 김천에 방산초등학교, 지례중'고등학교, 구성중학교 등의 설립을 위한 부지도 기증했다.

김창식(1937년생, 군위 출신, 오사카 거주) 씨는 부동산, 파친코, 택시회사로 번 큰돈을 조국에 보내려 했다. 그런데 당시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 터지며 재일교포가 거액을 한국에 송금하는 일은 위험한 일이 돼 버렸다. 반공법에 저촉될 수 있어서였다. 김 씨는 돈을 빼앗기는 건 상관없지만 자칫 붙잡혀 고문을 당하는 게 두려웠다. 그래도 김 씨는 온몸에 또 구두 밑창에 돈을 숨겨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며 결국 100만엔을 한국으로 날랐다.

6세대까지 오며 점점 약해지고 있는 한국과 재일교포 간의 연결고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경북 출신 재일교포들의 후손, 젊은 피들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오카야마 도민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3세대 이보창(1974년생, 오카야마 거주) 씨다. 이 씨는 재일교포로서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담대한 무언가를 꿈꾸고 있다. 통일이 되면 재일동포로 또 제3자의 입장에서 큰 역할을 하고 싶어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남북에 모두 뿌리를 둔 젊은 재일동포들이 모이는 '다이얼로그'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세계시민으로 사는 후대 세대도 있다. 앞서 언급한 서복용 씨의 아들 세일(1961년생, 고베 거주) 씨는 재일교포가 일본의 항공대에 진학할 수 없던 시절에 유학을 가서 항공사의 꿈을 이뤘다. 지금은 항공 관련 사업을 큰 규모로 펼치고 있다.

이보창 씨가 밝힌 꿈과 함께 서세일 씨의 이 말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제는 국적도 국경도 상관없다. 각각의 문화 차이를 서로 이해하면서 그것을 토대로 협력하는 것. 그것이 어디에서든 기본적인 생각이어야 한다." 무수한 차별을 받은 조상 세대의 심정을 대변하는 위로의 말이면서, 앞으로 재일교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당찬 선언으로 들린다.

315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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