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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골목길 도시다 2] <5>간판 자국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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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이미지 위해 이름 바꾼 은행, 옛 흔적은 못 지웠다

'KB' 로고 간판 뒤로 '국민은행' 로고 간판 자국이 보인다.(맨 위 사진) 엑슨밀라노 인근에 있었던 '엑슨24'.(왼쪽 중간) 기업 로고는 어느 순간 새 로고로 일제히 교체돼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런데 간판 자국으로는 종종 남는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대리점이 위치해 있던 대구 서성로의 한 건물에 있는 간판 자국.(오른쪽 가운데) '정소산무용학원' 간판 자국.(아래)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오규원

서울은 어디를 가도 간판이

많다 4월의 개나리나 전경(戰警)보다

더 많다 더러는 건물이 마빡이나 심장

한가운데 못으로 꽝꽝 박아 놓고

더러는 문이란 문 모두가 간판이다

밥 한 그릇 먹기 위해서도 우리는

간판 밑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소주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도 우리는

간판 밑으로 또는 간판의 두 다리 사이로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서는 사전에 배치해 놓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 마빡에 달린 간판을

보기 위해서는 두 눈을 들어

우러러보아야 한다 간판이 있는 곳에는

무슨 일이 있다 좌와 우 앞과 뒤

무수한 간판이 그대를 기다리며 버젓이

가로로 누워서 세로로 서서 지켜보고 있다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자세히

보라 간판이 많은 집은 수상하다

시의 첫 단어 '서울'을 '대구'로 바꿔도 이야기는 통할 것이다. 가게가 간판을 하나만 가진 경우는 거의 없다. 주 간판을 걸고 보조 간판도 장착하고 입간판도 세우고 출입문에다 창문에다 옥상에다 건물 벽면 빈 곳을 찾아 달고 또 단다. 이렇게 간판을 여러 개 갖춘 가게를 보고, 그런 가게로 가득한 골목을 보고, 오규원 시인은 "수상하다"고 했다.

이런 뜻은 아닐까. 가게의 과거 속 켜켜이 쌓인 '사건'이 많다는 것이다. 간판을 처음 달았을 즈음 벌어진 창업 내지는 개업이 아마도 모든 가게의 첫 사건이다. 가게를 옆 건물로 확장하며 새 간판을 하나 더 마련한 것도 사건이다. 시대가 바뀌어 새로운 가게 이름을 정해 간판도 바꾸면 이것도 사건이다. 가게가 아쉽게도 이전을 하거나 폐업을 하고 다른 가게가 들어서면 간판은 교체되는데 이 역시 사건이다.

간판 자국은 그런 사건들의 흔적이다. 시 맨 뒤에 한 구절 덧붙여본다. "간판 자국도 수상하다." 앞서 네 편의 기사에서 다루지 못한 대구 골목길 곳곳의 간판 자국들을 두서없이 소개한다.

◆간판 자국은 골목 실록

간판 자국은 주변 골목의 변천사를 알려주는 사료다. 푸드몰(foodmall)이라고 적힌 걸로 봐서 식당이었을 '엑슨24'의 간판 자국은 한때 대구를 주름잡은 대형 패션쇼핑몰 '엑슨밀라노'와 분명 연관이 있을 것이다. 지난해 12월 문을 연 대구신세계 주변에 '신세계'라는 단어를 상호에 넣은 가게들이 많이 생겨난 것처럼 말이다. 엑슨24 간판 자국은 엑슨밀라노가 있었던 한일극장(현 CGV한일)에서 중앙대로를 건너면 바로 나오는 교동시장 골목에 있다.

골목에는 기업 간판도 꽤 있다. 기업의 지사, 지점, 대리점 따위의 간판 또는 기업을 홍보하는 옥외 광고판이다. 이들 간판은 폐업이나 이전 같은 사건 말고 좀 특이한 이유로 자국을 남기곤 한다. 기업이 이름과 로고를 바꿀 때 일제히 전국의 관련 간판도 바꾸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1997년 IMF 금융위기 무렵을 시작으로 특히 21세기 들어 기업 인수 및 합병이 제법 이뤄졌다. 또 어떤 기업들은 과거 산업화 시대의 이미지에서 탈피하려고 애썼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름과 로고를 변경하는 기업이 많아진 것이다. 그 중심에 은행이 있다. 은행은 골목 곳곳에 지점을 두고 이익을 얻는 기업인데, 근래 많은 은행이 이름을 바꾸면서 거리 각지의 은행 간판도 잇따라 교체됐다. 한 예로 1963년 창립한 국민은행은 2001년 주택은행과 합치며 KB국민은행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이때 전국 지점들의 간판을 교체하면서 접착 흔적을 제대로 없애지 못하는 기술적 문제 등의 까닭으로 건물 벽면에 간판 자국을 적잖게 남긴 것이다. 다른 기업들의 간판 자국도 마찬가지 이유를 갖고 있다.

간판 자국에서는 가게와 기업의 이름은 물론 간혹 사람 이름도 찾을 수 있다. 대구 남산동 '정소산무용학원' 간판 자국은 20세기 대구 무용사를 이끈 무용가 정소산(1904~1978)을 21세기로 이어주는 흔적이다. 대구 출신 정소산은 5세 때부터 권번(기생조합)에서 스승들로부터 춤을 배우며 무용가의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부산과 수원 등 전국의 권번을 돌며 다양한 전통춤을 섭렵한 정소산은 1920년대 중반 고향으로 돌아왔다. 정소산은 자신이 춤을 배웠던 권번에서 후학들에게 춤을 가르쳐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권번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기에 1950년대에 하서동 금호호텔 인근에 자신의 이름을 넣은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세우고 춤꾼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대구 무용계 원로 김기전 무용가는 "정소산 선생은 남산동에도 정소산무용학원을 설립해 돌아가시기 전까지 운영했다. 평생 전통춤 전승 및 보급에 매진한 그의 무용 인생 마지막 흔적이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햇볕과 바람과 비와 간판 자국

이 밖에도 수많은 간판 자국을 대구의 골목길에서 찾았다. 지난해 10월부터 최근까지 수십 곳 골목에 가서 수백 개의 간판 자국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지만 지면이 한정돼 있는데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지닌 간판 자국을 찾기도 힘들어 그 일부만 다섯 편의 기사에 담았다. 실은 취재할 시간이 모자라 들르지 못한 골목이 꽤 있다. 다른 일 때문에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목격했지만 또 다른 일을 하느라 다시 가 볼 시간이 도통 나지 않아 취재를 포기한 간판 자국들도 좀 있다. 그만큼 발굴하지 못한 이야기도 많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 이 순간에도 골목 여기저기 간판 자국은 햇볕과 바람과 비를 그대로 맞으며 서서히 아주 서서히 색이 바래거나 지워지거나 떨어져 나가고 있다. 즉, 이들은 '완전하게' 소거되지 않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인간이 만든 인공물이지만 그 마지막은 오히려 자연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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