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인 탓에 치안이 불안하다는 나폴리 시내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나폴리항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마침 핀란드에서 온 유람선이 정박해 항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의 목표는 피렌체에서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탈리아산 가죽 가방을 사는 것도 목표 중 하나다. 길게 늘어선 노점상을 지나자 가죽제품 전문점이 보였다. 어수선한 매장이었지만 결혼 후 애용해온 B사 제품도 있었다. 유행이 지난 스타일이었지만 한국산보다 훨씬 싼 가격이었다. 운이 좋았다는 생각에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까지 했다. 아내는 그때 내가 어느 때보다 흥분한 목소리였다고 했다.
피렌체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새로 산 가방을 꺼냈다. 그런데 뭔가 조금 이상했다. 보증서는 물론 원산지와 가격표가 붙은 태그가 없다. 지퍼도 조잡하다. 두꺼운 양가죽을 사용하는 B사 제품치곤 가죽도 얇다. 그렇다, 짝퉁이었다. 순간 항구 주변 노점상에서 모조 명품을 팔던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피렌체 도착을 목전에 두고 나는 짝퉁을, 그것도 속아서 샀다는 생각에, 내가 이러려고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피렌체 호텔에 도착한 후 주머니에서 100유로가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호텔 앞에서 캐리어가 넘어졌을 때, 도와주겠다며 다가온 여자가 떠올랐다. 그날 밤 나는 마피아, 사기꾼, 소매치기가 득실대는 이탈리아를 당장 떠나고만 싶었다. 고대하던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이 있는 피렌체도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관광 대국 이탈리아라며 왜 치안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가.
여행을 포기하고 숙소에 누워 가져온 잡지를 펼쳤다. 마침 거기 서경식 선생이 쓴 이탈리아 기행이 있었다. 선생도 로마 테르미니 역에서 사기꾼 노파에게 당할 뻔했다고 한다. 피곤해 하는 아내에게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저런 사람들을 말끔히 정리해 버린 것이 나치였어. 독일 국민 대다수도 '나치가 거리를 청소해줬다'라며 그런 난폭한 해결책을 환영했고, 그 결과가 바로 홀로코스트로 이어졌어." 이어 소매치기와 사기꾼 같은 존재가 용인되는 이탈리아는 어쩌면 느슨해서 살기 팍팍하지 않은 사회일지 모른다며, 이 정도 피곤함은 '피해선 안 될 대가'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탈리아에 대한 낭만적인 미화일 수 있지만, 또 열악한 치안이 이탈리아 사회의 특별한 온정 때문일 리 없겠지만, 선생의 글을 읽으며 부랑자들을 말끔히 정리해버렸으면 하고 생각했던 내게도 나치의 심성과 트럼프식 사고가 도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얇은 가죽으로 만든 그 가방을 들고 나설 때마다 잘 속는 어리석음은 물론, 내가 속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고 생각한 어리석음과 세상을 단편적으로만 보는 어리석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역시 짝퉁 가방을 사놓고 늘어놓는 어리석은 합리화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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