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황지우의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 다시 문이 닫힌다. / 사랑하는 이여 /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황지우, 부분)
자꾸만 엇갈린다. 내가 미리 거기에 가 있음은 엇갈림에 대한 불안이 내재된 행위다. 엇갈림은 안타깝다. 나는 지금 살고 있고 그는 예전에 산다. 나는 여기에 살고 그는 저기에 산다. 나는 이곳을 보고 있는데 그는 저곳을 보고 있다. 이런 것이 엇갈림이다. 시간, 공간, 방향 등이 어긋날 때 엇갈림이 생긴다. 엇갈림이 기다림을 만든다.
내 마음이든, 내 몸이든 미리 거기에 가 있는 행위가 바로 기다림이다. 기다림에는 슬픈 바다 냄새가 난다. 그러면서도 빨갛게 혹은 노랗게 익은 가을 낙엽 냄새가 난다. 그건 정말 기다려 본 사람만이 안다. 지금 나에겐 파도 소리, 발자국 소리,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바람 소리, 아니 모든 소리가 네가 오는 소리로 들린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지금 네가 있다면 기다림이 아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너는 오지 않고 내가 미리 와 있는 거기에 기다림이 발생한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너다. 그러나 사실 너는 아니다. 네가 온다면 기다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이 닫힌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기보다 이젠 너에게로 가기로. 지금 네가 오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언젠가는 네가 올 것이니까. 그렇지 않으면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까. 어쩌면 네가 온다는 건 내 혼자만의 믿음이지 너의 생각은 아닐지도 모른다. 네가 온다면 이미 기다림이 아니고 오지 않는다면 기다릴 필요가 없는 엇갈리는 상황의 교집합, 그것이 기다림이다.
'너도 아팠냐? 나도 아팠다. 그러나 너무 아파만 하지 말자. 살아야 하지 않겠냐. 그런 쓸쓸한 인사 같은 것이 이 시집이다.'(시집, 중) 황지우는 아픈 시대의 아픔 그 자체다. 그래서 황지우의 시는 슬픔으로 통한다, 결국에는 아픔으로 시작했든, 웃음으로 시작했든 슬픔으로 끝난다. 아니 슬픔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슬픔은 운동한다. 사방으로 튀어 달아나서 슬픔은 또 다른 슬픔을 낳거나, 슬픔과는 상관없는 깨달음을 낳거나, 슬픔과의 교접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지혜를 얻는다. '아픔'이란 현실적인 아픔이기도 하고, 아픈 현실을 바라보는 아픔이기도 하고, 아픈 나를 바라보는 아픔이기도 하고, 아픈 너를 바라보는 아픔이기도 하다. 기다림도 그렇다.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하고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나를 스스로 지켜보는 것이 아프고 나에게 오지 않음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고 기다리는 나를 멀리서 지켜보면서 또 다른 상처를 만들 너를 바라보는 것도 아픔이다. 그런데 그렇게 아픈 것이 아름답다. 기다림은 아픔이지만 아름답다. 지금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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