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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김동인의 '수평선 너머로'와 블랙리스트의 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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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김동인

일제강점기에도 '블랙리스트'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었다. 이 시기 일본은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불온한 조선인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고 지칭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특별히 관리했다. 무장 항일투쟁에 투신한 독립투사,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 등 체제를 위협하는 위험인물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 블랙리스트를 특별 관리하고 감시, 통제하는 역할을 일종의 보안경찰인 고등경찰이 담당하였다. 조선인 고위 고등경찰은 하늘의 별과 같은 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고등 문관, 지금으로 말하자면 행정고시를 통과한 최고 엘리트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김동인의 '수평선 너머로'(1934)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불온 인물과 그를 뒤쫓는 조선인 고등계 형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소설은 상해에서 출발하여 조선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고등계 형사 이필호가 블랙리스트에 명기된 요주의 인물 서인준과 우연히 마주치면서 시작된다. 서인준의 귀국 목적은 단 한 가지, 친일 부호 윤 백작의 재산을 빼앗아 상해로 가져가는 것이다. 여기에 윤 백작의 재산을 노리고 조선에 잠입한 미국 갱단까지 가세하면서 '수평선 너머로'는 스펙터클한 스파이 소설로서의 면모를 완성해 간다.

'수평선 너머로'가 발표된 시기는 악명 높은 미국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의 전설적인 무용담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던 때였다. 그런 만큼 '미국 갱단'의 잠입은 조선 독자들에게 상당히 흥미진진한 소재였음이 분명하다. 미국인 갱단과 조선인 무장독립단체 간의 거액을 차지하기 위한 혈투. 이들을 저지하려는 제국의 비밀경찰. 이처럼 흥미 위주로 진행되는 소설 전개 속에서 고등계 형사 이필호의 모습은 시선을 끈다.

이필호는 동경제국대학 출신의 엘리트로 고등계에서 최고로 능력을 인정받는 형사이다. 제국의 안위를 위협하는 불순 세력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야 하는 것이 그의 책무이다. 그런 그가 '독립자금 모금'의 분위기를 강하게 띠는 서인준의 목적을 알고도 순간순간 서인준을 막는 일에 주춤한다. 그 자신이 '조선인'인 동시에 일본제국 관리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인 이필호'는 일제에 항거하는 서인준을 도와 조선 독립을 도모해야겠지만, '일본제국 관리 이필호'는 서인준과 같은 불순 세력을 괴멸시켜 제국의 안보를 유지해야 한다. 이와 같은 서인준의 딜레마는 일제강점기 제국의 관료로 복무했던 많은 조선인 엘리트가 직면한 딜레마이기도 했다.

이필호가 블랙리스트에 명기된 인물들을 쫓아다니던 이 시기에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총통이 되어 나치의 제3제국이 시작되었다. 일본과 독일 같은 여러 제국은 국가 안보와 이익을 지키고자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언론과 예술 출판의 자유를 막고 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8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 다시 '블랙리스트 망령'이 떠돌고 있다. 80년 전 일본제국의 블랙리스트는 조선인 항일단체의 체제 전복 위협에 맞서 제국의 안보를 지키고자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한국 사회의 블랙리스트는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고 한 것일까. 그 답은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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