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공포? 매혹? 검은색이 주는 강렬한 존재감…『이토록 황홀한 블랙』

이토록 황홀한 블랙/ 존 하비 지음/ 윤영삼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1961년 제작된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첫 장면은 어깨가 훤히 드러나 가는 팔뚝이 더욱 길어 보이는 지방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오드리 헵번(홀리 역)이 팔꿈치를 덮고 올라오는 긴 검은 장갑을 낀 채 부와 상류층의 상징인 보석상 '티파니'의 진열대를 구경하는 모습이다. 194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 장면이지만 검은색이 보여준 세련미는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다. 20세기 들어 패션의 중심, 특히 여성복 패션의 원형이 된 검은색은 1926년 코코 샤넬이 발표한 '리틀 블랙 드레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릎길이의 치마와 가냘픈 팔을 감싸는 소매 끝에 지그재그 문양만 넣어 심플한 느낌을 극대화한 디자인이다. 실제 이 옷이 어느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러스트를 실었던 '보그'는 이 옷이 '세상 사람이 누구나 입을 옷'이라고 예상했다. 1930년대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크리스티앙 디오르에 이어 1970, 80년대 이브 생 로랑, 비비안 웨스트우드까지. 검은색을 사랑한 많은 디자이너에 의해 '블랙'은 재탄생, 재해석됐고 세련미, 전문성이라는 이미지를 획득했다.

존 하비 케임브리지대학 종신석학교수가 '블랙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입는 곳에 관한 검은색의 역사를 정리한 저서 '블랙패션의 문화사'에서 보다 더 완벽한 검은색의 역사를 서술하고자 펴낸 책이 '이토록 황홀한 블랙'이다. 이 책은 광학'인류학'종교'예술'산업'건축을 넘나들며 시대와 문화적 맥락에 따라 검은색이 사회정치적, 미학적으로 어떻게 도구가 됐는지 서술한다. 영역을 넘나드는 장황한 서술은 다소 난잡하게 느껴진다. 그 연결 끈을 놓치지 않는다면 시공간을 초월한 방대한 정보는 치밀하다 못해 소름이 돋을 정도다.

저자는 검은색을 색채어로만 해석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검은색은 모든 빛을 흡수한 결과다. 우리의 시각은 빛에 의존한다. 이 때문에 검은색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빛의 부재를 느끼는 것이다. 검은색에 대한 논란은 여기서 출발한다. 내재한 모호함 탓에 죽음'슬픔'공포'악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권력'매혹'부'세련미를 의미하기도 한다.

검은색 역사 기행은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현생 인류의 조상에서 출발한다. 조상의 피부는 검었고, 인류가 처음 그린 그림도 검은색을 썼다. 1만 7천 년 전 프랑스 라스코 동굴 천장의 검은 암소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저자는 "그 어떤 색도 이처럼 정반대의 확고한 극단을 상징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듯 고대 인류에게 어둠의 색은 공포와 죽음을 상징하는 색이면서 신성, 풍요와 생명을 의미하는 색이었다. 부정성이 강조된 것은 기독교의 등장과 관련이 깊다. 죄를 죽음과 연관시키면서 검은색에는 죄악의 의미가 더해졌고, 머지않아 교회의 권위를 상징하는 색이 됐다고 말한다. 빛과 어둠의 대비를 강조하던 이슬람교에서도 검은색은 죄악과 성스러움을 동시에 가진 색으로 여겨졌다고 설명한다. 생활에 스며든 검은색은 스페인에서 유행했고, 전쟁과 상업을 통해 유럽으로 전파됐다.

모호함, 두려움, 화려함, 엄숙함은 렘브란트와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자주 발견된다. 책은 미술 서적에 버금가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검은색을 예술의 중심으로 끌어와 인물과 대상의 사실성을 부각하는 드라마틱한 그림들을 소개하면서 검은색의 의미를 재발견한다. '빛의 화가'로 불리는 카라바조는 빛의 명암이 주는 강렬한 대조의 효과에 주목한다. 위에서 빛을 내려 중요한 부분들을 강하게 비추게 했고, 나머지 주변은 그림자 속에 내버려 둔다. 카라바조의 이러한 경향은 '빛과 영혼의 화가' 렘브란트, 바로크 시대 색채의 마술사 루벤스로 이어진다. 저자는 어둠을 통해 빛을 함께 표현하는 검은색의 마법이 인간 내면에 있는 원초적인 '검은 물성'에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했다고 말한다.

검은색은 산업혁명기를 거쳐 사회적 삶의 구조로 편입된다.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됐고, 미술'영화'건축'패션 등 문화예술 전반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일본의 아사히 맥주 본사 건물이나, '블랙다이아몬드'라고 불리는 덴마크의 왕립도서관 등은 건축계를 뒤흔들었고, 카지미르 말레비치, 앙리 마티스 등을 통해 모더니즘 미술에서 변용된 블랙 텍스처는 앤설 아담스, 마틴 레인지 등의 흑백사진 작품에서 재발견된다.

검은색은 진화하고 있다. 2014년 영국의 한 나노연구기업은 빛을 99.96% 흡수하는 신물질을 만들었다. 머리카락 굵기의 1만 분의 1에 지나지 않는 탄소구조체가 가시광선뿐 아니라 적외선 영역까지 흡수해 빛을 비추어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과학기술이 발견한 지구 상의 '블랙홀'인 셈. 세상에서 가장 검은색은 '반타블랙'은 망원경의 난반사를 줄여 카메라 감도를 올릴 수 있고, 적의 눈에 띄지 않는 첩보 위성을 개발하는데도 쓰일 수 있다.

검은색은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검은색의 역사는 인간이 공포를 점령해 나간 기록"이라고 한 석학의 통찰을 통해 매혹적인 문화사를 만나보자. 580쪽, 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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