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每日 지상갤러리] 석재 서병오 ⑩국향서색(國香瑞色)

표피적인 왜색 그림에 저항…난초·대나무의 '文氣' 칭송

서병오는 1900년을 기준으로 인생의 반반을, 그전의 봉건시대 그 후의 일제강점기로 보낸 역사적 변곡점에 선 인물이다. 예술가로서 서병오 이해의 원점이 되는 것은 그가 어떤 예술관의 소유자인가 하는 점이다. 인생의 후반을 일제강점기에 살았지만 놀랍게도 그는 반(反)일본 예술관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의 예술관이 적힌 작품 '국향서색'(國香瑞色 )이 있다.

寫蘭竹與寫美術 大有不同處 蓋蘭竹 貴在文氣 不在形似 此可與知者道耳(사란죽여사미술 대유부동처 개란죽 귀재문기 부재형사 차가여지자도이:난초와 대나무를 그리는 것은 미술을 그리는 것과 크게 다르다. 대개 난초와 대나무는 그 귀함이 문기(文氣)에 있고 형사(形似)에 있지 않다. 이는 아는 사람이라야만 함께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일본의 미술문화에 대한 저항이자 거부다. 화초, 난초, 대나무 그림 같은 전통서화는 미술이 아니라는 주장은 서병오 예술관 이해에 중요한 대목이다. 당시 미술이라는 용어는 신조어 내지는 신개념이었다. 1922년부터 일본이 개최한 공모전 '조선미술전람회'라는 공식명칭에서도 드러나듯이 일본이 확산시킨 것이다. 바로 미술의 개념이 문제인데, 미를 만드는 기술이란 뜻이다. 미술이란 용어는 기술(테크닉)로서 꾸며내는 미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것에 능통한 사람을 화공(畵工), 조공(彫工) 등으로 불렀다. 일본 미술의 특성을 함축하고 있는 진정 일본다운 개념이었다. 일본의 오랫동안 지속된 무사문화의 일본 전통미술에서도 기본적으로 화려한 채색화에다 사실적 표현이 근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술이란 용어는 조선의 수묵문화에 반(反)하는 왜색미의 상징적인 개념으로 당시 한국인에게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가 갈파한 예술관은 분명하다. 학문과 정신적인 깊이에서 배어나온 문기(文氣)를 담은 우리의 서화는 채색을 사용해 표피적인 시각적 효과로 꾸며내는 일본의 미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우수한 예술이라는 뜻이다. 곧 미의식면에서 왜색 그림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명하고 있다. 소위 사의화(寫意畵)로서 수묵에 의한 전통문화의 관점에서 일본미술을 보면 형사(形似) 위주의 깊이가 없고 표피적인 얄팍한 눈 장난쯤으로 여겼다. 서병오는 1923년 '교남시서화연구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일생 양반문화로서 전통의 수묵에 의한 시서화를 고집했다. 왜색 추종의 일반 풍조에 맞서 미의식면에서 일본의 왜색미에 대한 확고한 거부반응과 저항을 표명한 작가로서는 국내 최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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