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임진왜란서도 빛났던 승리'영천성 전투'

성 버리고 도망간 군수 대신… 관군'의병 들고 일어나 탈환

영천은 한국전쟁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에서도 중요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바로 '영천성 전투'이다. 임진왜란에서 의미 있는 전투였다. 왜군에 밀리던 조선군이 거둔 승리였기 때문이다.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본 전투였다.

선조 25년인 1592년 4월 13일 왜군 선발대가 부산에 도착, 다음 날 부산성을 점령했다. 제2번대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언양과 경주를 점령하고, 22일 영천으로 진격했다. 영천성을 지키던 군수는 제대로 싸워 보지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왜군은 성에 1천여 명의 군사만 남겨두고, 충주 방향으로 북진했다.

영천에 주둔한 왜군은 마을을 약탈하고 집에 불을 질렀다. 주민을 죽이기도 했다. 영천 지역 유학자 정세아와 정대임, 신녕의 무인 권응수(權應銖)가 중심이 돼 의병을 조직했다. 영천 의병들은 7월 23일 읍성 남쪽 들에 본부를 설치했다. 경주와 경산 하양'자인, 의성, 포항, 대구 등지의 관군과 의병 약 4천 명이 집결했다. 권응수 의병대장을 비롯해 장수들은 영천성 공격 계획을 세웠다. 26일 전투가 시작됐다. 주력 부대는 동문과 남문을, 나머지는 서문과 북문을 공략했다. 서북풍을 이용해 화공(火攻)을 펼쳤다. 왜군을 물리치고 영천성을 되찾았다. 임진왜란 초기 아군의 승리였고, 경주읍성 등 경상도의 다른 지역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영천에 앞서 상주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바로 '북천 전투'로, 결과는 아쉽게도 패배였다. 이후 충주 탄금대전투의 패배로 이어졌다.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지자 민심이 극도로 혼란해졌고, 선조는 한양(서울)을 떠나 평안도로 피란하게 됐다.

조정은 4월 17일 이일을 급파했다. 23일 상주에 도착하니 목사 김해와 군사는 흩어져 달아난 상태였다. 이일은 곡식을 백성에게 나눠주면서 군사를 모집했다. 농민 800여 명으로 군대를 꾸렸다.

25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이 밀양과 대구, 구미를 거쳐 상주에 다다랐다. 왜군의 공격에 농민들은 동요했고 사수 60여 명만이 활을 쏘면서 대항했다. 전세가 불리하자 산길을 따라 문경까지 피했다. 조선군은 문경에서 싸우지 않고 충주의 신립 진영으로 후퇴해 26~28일 탄금대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완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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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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