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뿔소를 내가 직접 봤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국내 동물원에도 있다고는 하나 옛일을 되짚어봐도 확실한 기억은 없다. 아마 외국에서 박제품을 봤거나 TV '동물의 왕국'에서 본 게 전부일 터다.
어쩌면 앞으로는 동물원에서조차 코뿔소를 만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외신은 말레이시아에 남은 마지막 수마트라 코뿔소 중 한 마리가 악성 종양에 시달리다가 안락사될 처지가 됐다고 전했다. 수마트라 코뿔소의 야생 개체 수는 100마리에도 미치지 못하고, 아프리카 검은 코뿔소는 3천 마리 정도만 남았다고 한다.
코뿔소를 보기 어려웠던 건 본격적 산업화가 이뤄지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루마니아 출신 작가, 외젠 이오네스코가 60년 전인 1957년에 발표한 희곡 '코뿔소'는 어느 작은 마을에 느닷없이 코뿔소가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코뿔소란 낯선 동물이 제목이란 점에서 다소 황당한 이야기일 것이란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 카페에 앉아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나누던 시민들은 거대한 야수의 등장에 깜짝 놀란다. 하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모른 채 호기심으로만 받아들인다. 동물원에서 탈출한 놈이다, 서커스단에서 도망친 놈이다, 도시 주변 늪지대에 숨어 살던 놈이다, 뿔이 두 개여서 아시아종이다, 뿔이 한 개여서 아프리카종이다….
그러나 코뿔소의 실상은 인간 사이에 옮겨지는 무시무시한 바이러스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코뿔소로 변해간다.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도 '기자들은 모두가 거짓말쟁이야'라며 무시하던 이들도, '의사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병을 만들어낸다'고 열변을 토하던 이들도 어느새 이마에 혹이 나고 피부는 가죽이 된다.
이 희곡은 나치즘과 파시즘을 겪은 작가의 개인 경험에 기반을 둔다. 코뿔소는 20세기를 휩쓸었던 이데올로기의 공격성, 전염성, 집단성을 의미한다. 지식인들이 비인간적 폭력을 별 저항 없이 추종하거나 힘 있는 집단의 편에 서서 그 세계에 안주하는 세태를 고발한 것이다.
그런데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에 따른 조기 대선이란 거센 풍랑을 겪은 대한민국에도 언뜻언뜻 코뿔소가 보이는 것 같아 슬프다. 위장 전입, 세금 탈루, 논문 표절 등 각종 의혹이 제기되는 새 정부 각료 후보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키지는 않지만, 으레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면 대통령의 말마따나 '양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21세기 한반도에 서식하는 코뿔소는 '문자 폭탄'이란 신무기를 장착했다. 탄핵 과정에서도 그랬지만 연일 이어지는 인사청문회에서 더욱 기승을 부린다. 어떤 의원은 주말 동안에만 1만 통쯤 받았다며 "표현의 자유를 넘어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다른 의원은 "욕을 하도 먹어 배가 부르다"고 표현했다. 이러다간 세계 의회사의 최장 시간 필리버스터에 이어 또 하나의 기록이 쓰일 기세다.
비단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열성적 유권자의 일만도 아니다. 시청자가 온라인 투표로 아이돌그룹 멤버를 뽑는 TV 프로그램을 두고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연습생을 비방하는 글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진다. 10대 사이에선 거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수준이란다.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는 정보만 수용하려 드는 '확증편향'이 가짜 뉴스 창궐의 가장 큰 원인이란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물론 편을 가르는 것은 원시시대부터 전해온 자연스러운 본성일 터다. 조선은 허구한 날 당파싸움만 했다는 일제의 '당파성론'(黨派性論) 같은 식민사관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너도나도 자기 목소리만 높이다가는 진짜 '회색 코뿔소'(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하고, 무시했다가는 큰 화를 입는 위기)를 만날지 모른다. 갈가리 찢겼다가 이제 겨우 비정상의 정상화가 추진되는 시점에 우려가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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