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일광의 고향은 포항이다. 그의 안식처는 포항시내에서 다소 떨어진 호미곶면이었다. 내비게이션에 뭐라 입력하면 좋을지 물었더니 '구만교차로'라고 했다. '구만리'로 찾아오라는 말이었다. 구만리 해안 일대가 자신의 안식처라고 했다. 설마 했더니 구만리(九萬里)는 정말 '앞길이 구만리 같은'이라는 관용 표현의 구만리였다. 그러나 이 동네에선 '까꾸리개'라 불렸다. 까꾸리개는 표준어로 '갈퀴'다. 청어가 갯바위까지 떠밀려와 까꾸리로 쓸어 담았을 정도라 불린 지명이라고 한다.
"제가 교단에서 퇴직하던 때 마지막 학교가 바로 이곳에 있는 대보초등학교였어요. 지금도 이곳에 작업실을 두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어요. 간간이 문학기행으로 여기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서 안내도 맡곤 하지요."
호미곶면으로 이름을 바꾼 옛 대보면 구만리 앞바다는 지금도 울릉도로 가는 배들이 한눈에 보인다. 교실로 치자면 교단 위나 마찬가지였다. 커닝하려는 학생들의 눈동자 굴러가는 모양까지 잡아낼 위치였다. 심상찮은 지리적 요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로부터 군사 요충지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는 우리의 공군 기지가 있다. 100년 전에도 이곳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겠다며 일본이 거점으로 삼은 곳이었다. 동네 고지대에 오르면 영덕 축산항까지 한눈에 들어올 정도라고 하니 과연 모두가 기를 쓰고 이곳에 오르려던 이유였다.
이곳에서 8㎞ 정도 떨어진 곳에 구룡포 적산가옥들이 늘어서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과 관련된 흔적들이 적잖이 남아 있다.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3m 가까이 되는 높이의 쾌응환(快鷹丸, 배의 이름) 조난기념비였다. 1963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재일교포 일부가 앞장서 세운 추모비라고 알려져 있다.
추모비의 내용은 이렇다. 1907년 일본인 4명이 이곳 앞바다에서 숨졌다. 이곳을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 주변을 조사하던 도쿄수산대의 실습선에 탔던 이들이었다. 배가 누웠던 자리에는 녹색의 등대가 100년 넘게 있다. 이 동네 사람들이 배를 끌고 뭍에 올렸고 남은 선원들도 구했다고 전한다. 2007년에는 사고 100주년을 기려 일본인들이 추모제를 지냈다고 한다.
썰물 때가 되자 드러난 갯바위 위로 낚시꾼들이 보였다. 영일만으로 들어오는 물결과 영일만으로 들어찼다 나가려는 물결이 뒤엉키면 죄지은 물고기들이 낚싯줄에 제 입을 스스로 걸어 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양 그렇게 잘 잡힌다는 소문이었다. 김 작가는 "갯바위 바로 밑으로는 갑자기 바닷물이 깊어진다. 온갖 물고기가 낚인다"고 했다.
기암석인 독수리바위를 쳐다보며 넋을 잃겠다 싶으면 그 뒤 서쪽 방향에 있는 포항철강공단과 영일만항이 겹쳐 눈에 들어온다. 오후 6시가 넘어서자 해는 하루의 마지막 빛을 바다에 뿌린다. 마지막 햇빛들은 제각기 바다에 튕긴다. 영일만 바다에 은빛 비단 한 폭이 깔린 듯하다.
김 작가는 "보름이면 동쪽에선 보름달이 뜨고 서쪽으로는 해가 떨어지는 광경을 동시에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멋진 곳이건만 풍요의 상징인 까꾸리개는 불편했다. 청어를 말린 과메기를 떠올리며 침이 고이기 전,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기 직전인 100년 전 한반도의 상황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이곳 바다를 바라보며 작가는 '귀신고래', '조선의 마지막 군마' 등을 써내려 갈 수 있었노라고 했다. 그의 동화가 단지 동심을 위로하는 내용에 그치지 않고, 어른들도 함께 고민해야 할 주제를 던지는 이유가 짐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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