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에서(김훈/해냄)
백화점 문고에서 김훈의 '공터에서'를 만났다. 책 제목을 보면서 유년시절을 떠올렸다. 나는 어린 시절 역 주변에 살았다. 역 청사를 경계로 한쪽은 화려한 불빛의 도시였고, 반대쪽은 어둠 짙은 공터였다. 당시 그 공터는 나와 내 친구들의 놀이터였다. 공터와 놀이터, 공간이라는 면에서는 같지만 의미는 다르다. 공터는 빈 땅이고, 놀이터는 놀이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공터에서 놀이를 하면 그 공터가 놀이터가 되고, 놀이터에 노는 사람이 없으면 공터가 되기도 하지만….
"아버지는 거점이 없었어. 발 디딜 곳 말이야. 형은 그런 아버지가 싫어서 형 자신의 거점을 없앤 거야."(197쪽) "어머니는 망각된 기억의 핵심부를 살려내기도 했고, 지치면 혼자서 울었다. 마른 울음소리가 목구멍에 걸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243쪽)
이 문장들이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암시한다. '공터에서'는 20세기 한국 현대사를 살아낸 아버지와 그 아들들의 비극적 삶을 담아내고 있다. 김훈은 산문 미학의 진경을 보여주는 작가다. 산문집으로 '자전거 여행' '밥벌이의 지겨움' '라면을 끓이며' 등이 있고, 소설집으로는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 '내 젊은 날의 숲' 등이 있으며, 신작 '공터에서'는 그의 아홉 번째 소설로 지난 2월 3일 출간되었다.
소설은 아버지 마동수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서울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보냈고 만주와 상해를 떠돌다가 해방 후 서울로 돌아와 6'25전쟁과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시대를 살았다. 배우자 이도순은 흥남항에서 미군의 수송선을 타고 부산으로 피란왔다. 그들은 낙동강에서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되었고, 마장세와 마차세를 낳았다. 장남 마장세는 맹호부대 전투원으로 베트남에 파병되었다가 현지에서 제대해 괌으로 갔다. 그 후 한국으로 오지 않았다. 차남 마차세는 동부전선 GOP에서 근무했다.
마동수는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발붙일 근거지를 마련하지 못했다. 삶의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한 이방인이었다. 이도순은 흥남항에서 같이 배를 타지 못한 젖먹이 딸을 잊지 못했다. 마장세에게 한국이란 땅은 두려운 곳이었다. 베트남 전투에서 어쩔 수 없이 사살했던 전우가 묻혀 있고 아버지가 헤매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제대 후 가정을 꾸린 마차세는 잡지사 기자로 근무하다 3개월 만에 해직되어, 물류회사 배달기사로 종횡무진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달린다. 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기에….
한 가족의 슬픈 삶의 역사다. 우리 할아버지의 삶이었고 아버지 이야기였고, 내 이웃 그 누구의 현실일 수도 있다. 마 씨 집안사람들은 자기들의 공터에 집을 짓고, 밭을 일구고, 나무도 심어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빈 땅에 일상의 작은 것들을 채우지 못했다. 그래서 어둡고 쓸쓸하다. 그러나 공터는 언제나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 어둠을 넘고 쓸쓸함을 건너 내 빈터엔 무엇을 채워야 하나? 물어보게 만든다. 그래서 의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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