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물연 나루에 있는 초가 객점에서 잠을 자고 이른 아침에 다시 배에 올랐다. 일찌감치 돛을 올렸다. 북풍이 불자 돛은 위력이 대단했다. 삐딱하게 내걸린 누른 면포가 불어오는 북풍을 안고 가오리연처럼 휘어지자 배는 수면을 가르며 질주했다.
계승은 횡목에 앉아 돛이 삐꺽삐꺽 비명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돛대를 사이에 두고 머리 쪽에 서석림이, 맞은편에 구포 사람과 계승이 앉았다. 전날과 다르게 서석림은 아무에게도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는 장죽을 든 손을 무릎에 괴고서 이따금씩 입으로 연기를 내뿜으며 강물에 무료한 시선을 던졌다. 계승은 서석림의 입에서부터 거의 1미터나 길게 뻗어서 갑판에 닿은, 연초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장죽 대가리를 보고 있었다. 백통으로 된 하얀 장죽 대가리는 마치 담뱃대와는 무관하다는 듯 갑판 마루에서 부들부들 떨거나 한번씩 꼼틀댔다. 민달팽이 같네, 계승은 빙긋이 웃었다.
서석림은 뭘 생각할까. 이 강에서 보냈던 젊은 날을 떠올리고 있을까. 갑자기 불어난 강물에서 대피하던 사건들, 우기(雨期)에 탄력을 잃은 고무줄처럼 늘어나버린 제방, 태풍이 강타하여 산산이 부서진 상선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태풍이 지나가면 터진 재방으로 빠져나가 들판 구석에 처박힌 배를 찾으려 다니던 상인들을, 계승도 사문진에서 보았다. 엽전을 가득 실은 배가 뒤집혀졌을 때 수백 명 사람들이 물에 뛰어들어 잠수하기도 했다. 물에 떠내려 오던 죽은 돼지와 말들, 발가벗은 여자 시체와 잘 익은 수박들...... 상인들은 긴 장대로 떠내려오는 것들 중에 여자만 골라서 강둑으로 끌어왔다. 배들은 자주 침몰했고, 어느 때는 배에서 불이 치솟아 마치 강은 횃불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었다. 하구인 명지도(島)에서 생산한 소금이 4만 석이니까 그 절반을 낙동강으로 거래했다면 소금배만 해도 1천 척이 이 강을 오르내렸다. 그러니 어떤 사건인들 없었을까.
이윽고 구포에 도착한 것은 태양이 너른 들판 위로 긴 그림자를 뿌릴 때였다. 산들은 나지막했고 강은 바다처럼 광활했다. 가히 구포 일대는 중상류와 다르게 아직도 엄청난 유통지역이었다. 강을 건너는 관아 소속의 나루터가 있긴 했지만, 수십 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곳곳에 떠다니거나 강 복판에 닻을 내린 채 멈춰 있었다. 선착장 양편으로도 배들이 도열해 있었고 제방 위에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좀 더 내려가. 을숙도 가까이에 있는 강안이 엄궁동이야. 거기에 배를 대게."
일행은 배에서 내렸다. 계승은 오랫동안 배를 탄 탓에 다리를 약간 휘청거리며 서석림의 뒤를 따랐다. 서석림은 명지도와 을숙도를 쓰윽 돌아본 뒤, 익숙한 듯 강가에 늘어선 객주와 식점들 사잇길로 들어섰다.
서석림이 들어간 곳은 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수창사였다. 커다란 판자에 검을 글씨로 쓴 '수창상회(壽昌商會)'가 기와집 앞에 내걸려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대구 수창사가 동래에 엄궁, 하단, 부산항, 세 곳에 지점을 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곳이었다. 이즈음 대구 수창사는 상거래를 하지 않아 각 지점들이 독립한 상태였다. 수창사 한쪽은 식점이었고 다른 쪽에는 창고 같은 바라크 건물들이 커다란 자물통을 대문에 걸고 길게 이어졌다. 수창사의 방문이 열리며 몇 사람이 마당으로 뛰어나와 반색을 했다. 그러자 어디서 왔는지 사람들이 모여들어 큰소리로 떠들며 인사를 나누었다.
구포 사람이 돌아가고, 계승과 사공 방씨는 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서석림은 기다리고 있던 동래 사람들과 수창사 마루에서 식사를 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서석림이 나와서 여기서 잠을 자고 내일 떠날 거라고 말했고, 아이 하나가 와서 계승과 방씨에게 잠 잘 방을 일러주었다.
십여 명이나 모였으니 대화는 꽤 길게 이어질 것 같았다. 그동안 계승과 방씨는 강가로 나왔다. 갈대숲과 모래 둔덕으로 이루어진 을숙도가 눈앞에 보였다. 건너편의 넓은 평야 같은 지대는 명지도였다. 광활한 낙동강 삼각주에 낮은 창고와 설치물들이 끝없이 덮여, 마치 모래 위에 게딱지를 덮어놓은 듯했다.
"저게 다 염전이요. 저기서 가마솥에 바닷물을 담고 나무와 갈대를 태워 소금을 얻지요. 일 년에 사오 만 가마니를 구워내니까, 이 일대가 소금천지죠."
"정말 대단하네요. 어염미두(魚鹽米豆)라더니. 인부들 수도 어마어마하겠군요."
"이제 저것도 끝장이요. 일본이 인천에다 바닷물을 논에 가둬놓고 햇살로 물을 말려서 소금을 거두게 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렇게 되면 동래도 텅 빌 수밖에."
"왜 그렇죠?"
"가마솥 소금에 비해 논 소금이 일손이 적게 들어간다니까. 소금 값이 떨어질 텐데 버티질 못하죠."
그런 얘기들을 주고받다가 수창사로 돌아왔다. 서석림이 있는 방은 여전히 불이 켜 있고 말소리가 새나왔다. 사공 방씨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내 곯아떨어졌다. 뭔 얘기를 주고받고 있을까. 대구에서 동래까지 내쳐 달려왔고 부산 인사들이 모였으니 긴요한 얘기가 오갈 터였다. 바람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계승의 귀에 건너 방의 이야기가 수런수런 들려오곤 했다. "초량은 이미 일본 물자로 뒤덮였소. 여기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계승은 수개 월 전에 초량에서 바다 매립 공사장에 있었기 때문에 부산항 쪽 현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지금 저들이 신화(新貨)를 풀고, 길을 닦고, 교량을 세우고 있어요. 그게 저들의 돈으로 만들고 짓는 거지만 실제는 우리 주머니에서 나올 돈이에요. 정말 해괴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돈을 빌려서 지은 거니 우리 것이 자명한데, 저들은 자기네 소유라고 주장합니다." 서석림이 격분에 차서 음성을 높였다. "우리가 돈을 못 갚을 게 뻔하다고 믿는 거지요!" 누군가 자조하는 목소리. "갚지 못하면 일본 게 된답니다."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하는 소리. "휴우, 나중에는 일본 것을 밟지 않으면 대문 앞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갈 거요." "그러면 어쩌야 합니까?" 방안이 잠잠해졌다.
"서 시찰, 각 지역마다 사정이 달라요. 부산은 일본이 바다를 매우고 시가지를 건설하고 있어요. 이미 늦었습니다." 또다시 두서없는 말들이 왁자하게 쏟아졌다. "나라가 통치를 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상업이 번창했습니다. 백성이 살길을 찾아 스스로 일어난 거지요." 서석림의 목소리였다. "새로운 나라가 들어와서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허허참, 우리에게 일본이 나라랍니까!" 문이 벌컥 열리고 몇 사람 뛰쳐나왔다. 배웅하는 이도 없었다. 다시 방에서는 조근거리는 목소리로 대화가 이어졌다. 바람벽에 기대앉은 계승은 이부자리로 몸을 눕혔다. 언제인지 잠이 들었고 깨어나자 사방은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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