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32>-엄창석

엿새 후, 광문사 문회(文會)가 하루 앞으로 다가오자 도시는 수런거렸다. 점심 무렵 기차 정거장을 빠져나오는 외지인들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하면서 경산에서 들어오는 길에서, 서울에서 내려오거나 밀양에서 올라오는 경부가도로 낯선 사람들이 줄곧 도시로 들어오고 있었다.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선비 차림의 초로들, 머리를 짧게 깎고 푸른 외투를 걸친 중년들, 가마에 몸을 실은 양반들, 조랑말에 얹혀 오거나 붉은 큰 말을 타고 성안으로 들어서는 남자들도 보였다.

겨울 내내 한산했던 성의 남문과 감영 정문인 관풍루 사이가 모처럼 번다했다. 구경꾼들마저 늘어서 있어서 남문 밖의 옹기전과 서문 밖의 달서교는 아주 어수선했다. 말들의 발굽소리와 아낙들의 비명소리와 어린 아이들의 울음소리, 길을 트라는 종자(從者)의 고함소리가 자옥한 먼지에 섞여 낭자하게 피어올랐다.

계승은 김광제의 지시를 받고 농루(隴樓)로 가는 길이었다.

어제 의병들이 영천 시티재에서 마욱진의 마차를 공격했을까? 계승은 도시의 소란이, 멀리 떨어진 영천의 격전과 관계가 있지 않은지 자세히 살폈다. 이날 아침에 수비대 기병들이 남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게 마욱진의 마차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숨은 의병들을 색출하거나 전투를 치르기 위해 수비대를 급파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제 오늘, 달성회 회원들을 만나 소식을 들을 겨를도 없었다.

지금 계승이 찾아가고 있는 농루는, 지금은 초로에 접어들었지만 한때 유명한 기녀였던 염농산이 운영하는 예자옥(藝者屋)의 명칭이었다. 이 무렵 대구에는 60여개의 예자옥이 있었는데 일인이 차린 곳을 제외하면 농루가 가장 규모가 큰 편이었다. 규모에서만 아니라 농루 주인인 염농산이 내일 문회 손님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문회 준비를 위해 광문사 직원들이 일을 나누웠다. 계승은 참가자들에게 배포할 문서를 빠르게 필사(筆寫)할 능력이 되지 않아, 여자들처럼 음식 준비나 돕는 허드렛일에 처해졌지만,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았다. 애란이 농루에 있기 때문이었다.

농루는 서문 앞 수창사가 있는 삼거리에서 철도 방향으로 걸어가 망경루가 보이는 지점쯤에 나타나는 입구 자(口) 기와집이었다.

어째 농루가 이곳에 있는 것을 몰랐을까.

자신이 7년 만에 대구로 돌아왔을 때, 성을 헐고 난 다음날 아침, 농루 앞을 지나서 계산성당까지 내려가지 않았던가. 망경루 앞에 우현서루가 우람하게 있었지만 그것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오래되고 낡은 정자인 북후정만 개울물 건너에 보였었다. 성벽이 헐리고 홀로 남은 망경루의 앙상함이 괜히 처참해서 다른 건물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은 탓이었다.

애란이 기녀가 되었다는 소식을 장상만에게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이상하리만큼 반가웠다. 사실 누구의 아내가 되었거나 돈 많은 남자의 첩으로 들어갔다면, 자신이 이곳을 떠난 후 7년 동안 늘 꿈에 그렸던 애란은 다시 가까이할 수 없는 물거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농루에서 기녀를 하고 있다면 몸 파는 창기가 아니란 뜻이었다.

흐흥, 창기면 어때? 예기(藝妓)든 창기든.

그가 떠날 때 열한 살이었던 애란은 뽀얗게 베를 짠 옥양목 치마를 나풀거리며 헤실헤실 웃는 얼굴을 한 채 조금도 나이를 먹지 않고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약간 주저앉은 콧등과 머루 같은 눈동자와 탐스런 머릿결이, 어느 날 광문사를 찾아온 그녀에게서 열한 살의 모습 그대로 발견되었다. 광문사에 신문을 사러온 그녀를 만난 것이다. 신문대 앞에서 계승을 본 그녀는 어깨까지 올린 장옷이 발밑으로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나무에 박힌 못처럼 굳었다.

"쟤가 앵무 뒤를 잇는다는 기생 금릉이야. 가야금과 난을 잘 친다네."

권종성이 일러주었다. 애란과는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다. 애란이 어느 기루에 있을까? 계승은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다시 신문을 사러 오겠지. 광문사는 당시 가장 많이 팔리는 대한매일신보의 대구지국이었다. 그녀가 돌아간 후 광문사는 정말 뜨거웠다. 인쇄실도, 신문대가 놓인 회의실도, 마당도, 마루 밑의 아궁이도, 계승이 잠자는 인쇄실 뒤칸 도장방도. 하지만 애란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이곳에 나타날 애란은 여전히 열한 살 앳된 소녀겠지만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신문대 앞의 공기는 견딜 수 없는 질투로 끈적거렸다. 그녀가 지금 어디 있지? 어디서 무엇을 하지? 계승은 신문을 집었다 놓았다가, 펼쳤다 덮었다가 하면서, 어떤 사내놈에 대해 끓어오르는 기분 나쁜 질시를 억눌렀다.

"아, 마침 잘 왔네요. 내비동(비산동)에 돼지고기를 가지러 가야 하는데 손이 부족해요."

농루의 열린 대문을 들어서자 주인인 앵무가 마당 한가운데 연못에서 얼음을 건지다가 계승을 보며 활짝 웃었다. 아낙들과 기녀들이 부산하게 부엌을 오가고 있었다. 애란이 보이지 않았다. 부침개 냄새가 부엌에서 흘러나왔고, 마루에서는 어린 기녀 두엇이 산적을 만들려고 대나무를 잘라 가늘게 다듬고 있었다. 무엇을 끓이는지 가마솥이 김을 내뿜었다. 내비동 도살장에서 지게로 돼지고기를 가져오기에는 양이 너무 많다고 했다. 달구지를 기다리는 동안 계승은 옆채를 돌아 후원으로 갔다. 거기에 애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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