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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빈의 시와 함께] 숟가락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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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1954~ )

#숟가락질

이 경(1954~ )

어머니 젖에 소태를 바르면서

엉겁결에 배운 숟가락질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질들을 배워야 하는지 모르고

밥알을 퍼 올리기 시작했을 게다

밥 한 술이 흙 한 삽과 맞먹는 줄 모르고

그것 때문에 호미질을 배우고

삽질을 배우고 쟁기질을 배우고

비럭질을 배워가야 하는 것을 모르고

논바닥이 개울을 퍼 올리듯

아궁이가 땔감을 집어삼키듯

소가 콧구멍으로 하늘을 퍼 담듯

살을 끌어들이고 피를 끌어들이고 불을 끌어들이며

숟가락질 멈추지 않았을 게다

삽질을 놓고도 숟가락질은 남아서

바느질을 놓고 걸레질을 놓고도

숟가락질은 구차하게 남아서

가장 먼저 시작해 맨 나중에 놓아지는

슬픈 숟가락질은 남아서

그래서 숟가락이라는 이름 뒤에

질이라고 하는 꼬리가 붙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시집 『오늘이라는 시간의 꽃 한 송이』 (시학, 2014)

숟가락의 역사는 자못 깊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숟가락은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나진초도패총에서 출토된 골제품이라 한다. 예로부터 숟가락은 젓가락과 함께 모란꽃, 연꽃의 꽃무늬나 수(壽), 복(福)의 길상문자를 수놓은 비단주머니에 넣어 혼수품으로 장만되기도 했다. 삶의 오랜 숨결이 묻어나는 숟가락질을 필두로 호미질, 삽질, 쟁기질로 이어지고 비럭질까지 감수하며 온몸 바쳐 살다가 어느덧 삽질, 바느질, 걸레질에서 해방되고도 숟가락질만 구차하게 살아남았다니! 그렇다면 슬픈 숟가락질인가? 기쁜 숟가락질인가? 사시사철 시시때때 이어지는 숟가락질에는 밀고, 달고, 맺고, 푸는 사람살이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가장 먼저 시작해 맨 나중에 놓아지는 숟가락질은 삶의 시작과 끝을, 또는 자아의 형성과 완성을 의미한다.

온누리 숨 탄 것들아! 우리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논바닥이 개울을 퍼 올리듯, 아궁이가 땔감을 집어삼키듯, 소가 콧구멍으로 하늘을 퍼 담듯 숟가락질을 멈추지 말아서 '오늘이라는 시간의 꽃 한 송이' 피워나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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