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한진, 조퇴(趙退)하라

'사업을 하노라면…전쟁터라고 해도 뛰어들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조중훈, 1996년) '베트남 수송사업을 돌아볼 때 그것은 참으로 100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사업이었다.'(조중건, 2005년)

오늘날 한진(韓進)의 기업집단은 조중훈(趙重勳) 창업자가 동생(조중건)과 함께 일궜다. 조중건의 뜻풀이처럼 '한민족의 전진'을 위한 사업으로 시작했다. 1945년 11월 트럭 한 대로 한진상사를 세운 조중훈의 발판은 군수물자 수송과 베트남 사업이었다. 먼저 1956년 11월 7만달러짜리 미군물자 수송권을 땄고 차도 늘었고 1959년엔 동생이 합류했다.

1965년 베트남에 들른 조중훈은 1966년 베트남 군사물자의 첫 계약을 땄다. 월남전으로 당시 국내에는 '젊은이여 베트남으로 가라'는 말이 돌 만큼 열풍이었다. 파월기술자의 한 달 수입이 국내 도시근로자 월평균의 10배가 넘었다. 형제는 1971년까지 5차례 계약 갱신에 1억5천만달러의 실적을 올릴 만큼 회사를 키웠다. 나라도 미국과 계약 때 파격적인 지불보증 등 특혜로 힘을 보탰다.

한진이 큰 데는 목숨조차 던지고 나쁜 환경, 살인적 근무조건을 견딘 근로자의 피와 땀, 눈물이 흠뻑 배여 있었지만 한진은 이를 외면했고 결국 1971년 9월 '칼빌딩 방화' 같은 비극을 불렀다.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한 근로자들의 투쟁에도 정부, 한진은 귀를 닫았고 200여 명이 농성 중 불을 질렀다. 물론 한진은 무사했고 힘없는 근로자 63명은 죄인이 되고, 13명은 징역 1~5년을 받았다.

정부의 전폭 지원과, 월남전의 특수에 나라의 비호까지 덤이었으니 한진은 순풍에 돛을 단 배였다. 한진은 '돈더미'에 올랐고 '한국의 엘도라도'(상상 속 황금 도시)였던 월남으로 날로 성장했다. '땅'의 한진이 드디어 '하늘'(대한항공), '바다'(해운)로까지 '전진'한 배경이다. 오늘의 한진은 두 형제의 시운과 이런 자양분으로 제 모양을 갖추게 됐다.

이런 한진이 말썽이다. 창업을 지나 대를 더할수록 꼴불견이다. 조중훈의 네 아들(조양호 등)의 재산 분쟁 등 뭇 잡음도 모자라 손자손녀(조양호 아들 조원태, 딸 조현아'현민)의 짓거리는 점입가경이다. 손자(폭언'폭행 등)와 두 손녀(조현아의 '땅콩회항', 조현민의 '물벼락 소동')의 작태는 안하무인 행동과 갑질 논란이 초점이다. 특히 조현민의 물벼락은 국민들이 오죽했으면 '대한항공 사명을 바꿔 달라'고 청와대에 바랐을까. 이들을 보노라면 '한진'의 이름 대신 차라리 '조퇴'(趙退)가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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