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시윤의 에세이 산책] 밥은 먹고 삽시다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문득, 어머니가 해 주시던 밥이 생각난다. 그 밥이 그 밥이겠거니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바쁜 일상에서 주어지는 밥은 낯설다. 먹는 둥 마는 둥, 밥이 목구멍으로 다 넘어가기도 전에 숟가락을 놓아야 할 때가 있다. 긴장하지 않으면 제 몫조차도 챙길 수 없는 치열한 세상에서 밥은, 쉽게 뒷전으로 밀려나곤 한다. 그러면서도 생의 본질은 먹고사는 데에 있어 언제 먹었느냐는 듯 또 허기가 지곤 한다.

어렸을 적, 칼바람이 재래식 문틈을 비집고 들어올 때면 나는 으레 부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엄마, 배고파 죽겠어."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던 시절, 어머니는 사뭇 조금만 기다리라며 나를 다독이셨다. 내가 장난삼아 던져 넣던 잔솔잎에 화르르 불이 오를 때면 어머니는 급히 지은 밥은 맛이 적다며 불쏘시개로 가마솥 아래 화기를 삭히느라 애를 먹곤 하셨다. '그 밥이 그 밥이지, 밥이 무슨 맛이 있어?' 어린 나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옅은 온기마저도 가마솥으로 스며들고 나면 그제야 어머니는 밥을 푸셨다. 고봉으로 눌러 담은 고봉밥에 가족들은 힘차게 숟가락을 내리꽂았다. 기쁘게 감당했던 우리들의 몫, 정직하게 하루를 지켜낸 믿음과 신뢰의 대가였고, 내일 또한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약속하는 말 없는 다짐과도 같았다.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든 좌절하지 말고 살아가라는 어머니의 당부 같은 것이 서려 있는 듯도 했다.

제 몫을 다 비우고서도 입맛을 다시는 막내의 그릇에 차용증서도 없이 한 주걱의 밥이 덤으로 채워진다. 분명, 그것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올록볼록 터질 듯 오물거리는 어린 자식의 밥 먹는 모습에서 어머니는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원금과 이자 계산도 없이 한 줌 누룽지까지 죄다 긁어 자식들의 손에 쥐여 주시고서도 당신은 허기지지 않으셨을까.

해가 이슥해진 퇴근길에 전화버튼을 누른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머니와의 인사는 밥에 머물러 있다. "엄마, 배고파 죽겠어." 새파랗게 젊디젊은 딸의 말에 "밥 거르지 말고 다니거래이-" 하신다. 벌어먹고 사느라 고생한다며 걱정부터 앞세우는 어머니의 위로는 늘 나를 달랜다. 삶은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밥을 하듯 은근히 뜸을 지우며 참고 인내하며 사는 것이라는 어머니의 철학이 욕심 많은 나를 위로한다.

오늘은 어머니의 밥을 흉내 내 본다. 나는 요즘 어머니의 밥을 닮아가려고 애쓴다. 밥에는 밥을 한 사람의 냄새가 서려 있고, 밥을 한 사람의 빛깔과 정서가 스며 있다. 정성과 염원을 담고 탱글탱글한 밥알로 부풀려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내를 감수해야만 한 그릇의 고봉밥이 될 수 있을까.

삶에서 가장 간단명료하게 자리 잡은 밥은, 무미건조하게 말라가는 세월의 낱알들이 모여 질펀하게 불고 붙어 다시 일어서는 용기의 한 그릇 밥 힘이 되는 것이리라.

늦은 귀가에 종일 바빠서 밥도 못 먹었다는 남편에게 얘기하고 싶다. "너무 애쓰지 말아요. 밥만 먹고 살면 돼요.

박시윤 수필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