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력에 의한 간음과 강제추행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을 두고 논란이 숙지지 않고 있다. 현행 성범죄 처벌체계가 현실과 동떨어진 게 주된 원인이라는 평가지만, '미투운동'을 폭발시켰던 안 전 지사의 성폭력 의혹이 도리어 미투 확산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위력의 존재감' 자체만으로 처벌할 수 없어
14일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부장판사 조병구)는 피감독자 간음 및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안 전 지사는 지난해 7월부터 올 2월까지 러시아, 스위스, 서울 강남의 호텔과 오피스텔 등에서 수행비서였던 김지은 씨를 4차례에 걸쳐 간음하고, 음식점이나 KTX 등에서 껴안거나 입을 맞추는 등 5차례 강제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부는 유력 정치인인 안 전 지사의 사회적 지위 등은 피해자에게 '위력'에 해당한다고 전제했다. 그러나 '위력의 존재감'만으로는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억압했다고 볼만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의 유일한 증거인 피해자의 진술과 성폭력을 전후한 행동 등이 위력에 의한 간음 피해자로 보기 어렵다는 게 핵심이다.
재판부는 이러한 근거로 처음 성관계가 이뤄진 지난해 7월 30일 러시아에서의 상황을 들었다. 피해자가 피해를 당한 다음날 아침과 저녁에도 안 전 지사와 함께 한식당과 와인바 등을 찾았고, 굳이 가식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는 지인과 대화에서도 지속적으로 안 전 지사를 지지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보였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문을 열고 나가는 등 최소한의 회피와 저항을 할 수 있었음에도 그런 언행을 보이지 않았다"며 "간음 피해를 잊고 수행비서로서 안 전 지사를 열심히 수행하려했다는 피해자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논란을 의식한 듯 '성인지 감수성적 관점'을 유지했다고 강조했다. 피고인이 성적인 길들이기를 하는 '그루밍'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닌지, 혹은 혐오적인 사건에 직면해 무기력해지고 현실순응적이 되는 '학습된 무기력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닌지 봤다는 것이다. 또 해리나 긴장성 부동화 또는 심리적 얼어붙음 등의 현상을 겪은 것은 아닌지 등을 검토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신빙성이 떨어지는 진술과 태도를 보이는 것이 성폭력 피해나 2차 피해로 인한 충격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을 했지만 그런 상태에 빠져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후진적인 강간 피해 기준"여성단체 성토
여성사회단체들은 이번 판결이 미투운동을 사회 전반으로 확산하는데 걸림돌이 될 것으로 우려했다. 미투 운동과 관련된 핵심 재판에서 '업무상 위력'을 부인하는 방향으로 결론났기 때문이다. 업무상 위력의 인정 여부는 숨어있던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중요한 기준으로 꼽힌다.
지역 여성단체들도 반대 움직임에 동참했다.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회원 50여명은 18일 서울 종로구 역사박물관 앞에서 열리는 대규모 집회에 참석한다.
신미영 대구여성회 사무처장은 "우리나라 현행법이 명시한 강간 성립 조건 등은 국제적인 기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가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사를 밝힌 만큼 여성단체도 피해자를 도와 사건 해결에 힘이 되겠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재판을 두고 사회 전반에 만연한 성문화와 성인식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삼아야한다고 지적한다.
이번 재판을 맡은 조병구 부장판사는 선고 공판 말미에 현행 성범죄 처벌체계가 사회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피해자가 적극적인 저항 의사를 표하지 않으면 피고인의 행위를 처벌하지 못하는 현행법 체계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조 부장판사는 "폭행이나 협박, 위력의 행사 등의 행위가 없더라도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는데도 성관계로 나아간 경우나 상대방의 명시적이고 적극적인 동의 의사없이 성관계를 맺는 경우에도 강간으로 처벌하는 체계를 도입할 지는 입법·정책적 문제"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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