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필이란 이름은 조부가 지어 주었다. '형'(鎣)은 '줄'로 '거친 쇠를 갈아 매끈하게 하는 공구'이며 '필'(弼)은 도지개로 '뒤틀린 활을 바로잡는 틀'이다. '거친 것을 갈아 빛을 내고 뒤틀린 것을 곧게 펴는 연장'이 되라는 선대(先代)의 기원을 담았다. 스승인 위창은 '간송'이라는 아호를 선사했다. '간'(澗)은 '계곡물 간'자이다. 그래서 간송은 '계곡 물가의 솔'이다.
한문학자 황위주의 도움을 받아 좀 더 추적해 보면, 송나라 시인 황정견이 스승인 소식의 사람됨을 칭송한 시에 '청송출간학'(靑松出澗壑)이 나온다. '푸른 솔이 물 흐르는 계곡에 솟아 있으니'라는 뜻이다. 첫 자와 끝 자를 지우면 '송출간'이 된다. 여기에 '출'자를 지우고 글자 순서를 바꾸면 '간송'이 된다. 간송 전형필, 줄(鎣)과 도지개(弼)로 살아, 계곡 물가에 선 솔이 되었다.
그의 초년의 삶은 믿기 힘든 일의 연속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작은집으로 입양되었고 열 살에서 스무세 살 사이에 본가와 양가의 모든 어른들이 돌아가셨다. 생의 근본 문제인 '나는 누구이며 무엇하고 살 것인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2천644만6천여㎡(800만 평) 이상의 땅을 상속받았다. 이제 '유산을 어떻게 잘 관리하고 쓸 것인가?'라는 숙제까지 맡게 되었다. 입양과 가족들의 죽음 앞에서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생의 이치는 이미 깨치고 있던 터였다.
19세기 후반에 시작된 제국주의적 약육강식의 물결이 세상을 휩쓸고 있었다. 열강들은 약소국의 영토를 식민지화했으며 문화재를 마구잡이로 수집했다. 그렇게 수집된 유물은 런던, 파리 등지의 박물관을 지금도 가득 채우고 있다. 경술국치로 국권을 잃은 우리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도굴꾼과 영리 목적의 수집가들은 문화재 반출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와세다대학을 1930년, 24세에 졸업한 간송은 그런 모습을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보고 들었다. 다 털려 빈 깡통이 된 나라를 후대에 물려줄 수는 없었다. 그의 뜻을 지지하는 사람도 많았다.
역사와 민족의식을 심어준 월탄,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워준 춘곡, 심미안을 길러 주었고 문화재가 곧 '민족의 혼'임을 일깨워 준 위창 등 많은 분들이 있었다. 그는 문화재가 만들어진 시기, 당시의 평가, 그리고 가격에 상관 않고 수만 점을 수집하였다. 그중엔 훈민정음 해례본같이 훗날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많은 문화재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존하는 일은 더 어려웠다. 6·25 발발 사흘 만에 서울은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유물을 보화각(현 간송미술관 전신)에 남겨둔 채로 납북을 피하기 위해 그곳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은신했다. 보화각을 지켜보며 9·28 서울 수복 때까지 아흔이틀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그가 살았던 을사늑약 이듬해부터 5·16 이후까지, 그가 터 잡은 계곡의 물은 거셌다. 비라도 쏟아지면 거침없이 불어난 물이 그의 종아리를 후려쳤다. 쓸려 가지 않으려, 않으려고 기슭을 향해 휘어져 버티다 아침을 맞았다.
그렇게 지켜낸 것들 중에서 조선 회화 명품을 9월 16일까지 대구미술관에 전시하고 있다. 거기 간송이 있다. 그는 정선의 삼부연과 박생연 같은 산수화 속 맑은 물가에서 솔이 되어 우리를 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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