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첫눈이 내리면

박병선 논설위원
박병선 논설위원

첫눈이 오면 무엇을 할까?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를 만나고 싶다. 친구도 좋고, 옛 애인도 좋고, 스승도 좋다. 그와 함께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눈 내리는 풍경을 한없이 지켜보겠다. 첫눈이 내리는 날, 일상에서 벗어나 낭만에 젖고 싶은 것은 누구나 소망하는 일이다.

시인 정호승은 '첫눈 오는 날 만나자'에서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고 했다. 정겹고 낭만적인 시구다.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몇 년 전에는 대구에 첫눈이 오면 영화 '닥터 지바고'를 함께 보는 작은 이벤트가 열리곤 했다. 굳이 연락하지 않아도 '닥터 지바고'를 좋아하고, 추억에 빠져들고픈 이들이 자연스럽게 모였다. 3시간 20분의 상영 시간에 몇 번씩 본 영화지만, 끝없이 펼쳐지는 시베리아의 설원과 자작나무, 오마 샤리프·줄리 크리스티의 애절한 사랑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뒤풀이로 눈을 안주 삼아 소주잔 기울이면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첫눈은 누군가에게는 낭만이고 추억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고통이고 악몽일 수 있다. 군에 갔다 온 이들은 눈을 두고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 '악마의 X가루'라고 했다. 눈만 내리면 온종일 삽 들고 제설작업을 했던 고통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첫눈을 보고 좋아했다가 고참들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는 이도 있다.

11일 대구에 첫눈이 내렸다. 아침부터 내린 눈이 금세 비로 바뀌어 눈도 아니고 비도 아닌 '싸락눈'이 됐다. 다음 날, 곳곳이 얼어붙거나 진창길로 바뀌었다. 통행에 불편하기 짝이 없으니 짜증 섞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길가의 얼음은 아이들에게는 스케이트 타는 즐거움을 주지만, 노인들에게는 낙상의 위험을 준다. 그렇더라도 눈 내리는 날이 좋다. 올겨울, 옛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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