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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고시조로 읽는 옛사랑/ 아름다운 사랑이 굽이굽이 맺혔어라/임형선, 채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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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인선 학이사 독서아카데미 회원

오래전 교과서에서 만난 황진이의 시조를 다시 만나니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문풍지 우는 소리 들으며, 호롱불 아래서 읽었으면 더 좋았을 고시조집이다. 30년을 기다려 빛을 보게 된 200자 원고지 1,500여 장의 자필 원고가 더 감동시켰다. 이 원고를 쓰기 위해 기울인 정성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겠다. 자료를 찾고 비교하고 고어를 해석해낸 일 만도 대단한 일이다.

이 책을 펴낸 임형선 작가는 1987년 '현대시조'로 등단해 '월간문학'과 '부산 MBC'에서 주최한 문학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 동화, 동시조 등 50여 권을 출간했고 함께 지은 시집도 여러 권 있다.

이 책의 구성은 1부, 평시조에서 유명씨와 무명씨로 나뉘고 2부 사설시조 엇시조에서 다시 유명씨와 무명씨로 나뉜다. 각 작품마다 원문, 해설, 어구풀이, 작품이 쓰인 배경까지도 소개하고 있어서 읽기에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 서평에는 우리말 풀이로 된 것만 실었다.

바람도 불든지 말든지, 눈비도 오든지 개든지 나와는 상관이 없어라

임께서 아니 와 계시면 어찌할 것인가 걱정하겠지마는

우리 임께서 이미 오신 후이니, 바람이 불든지 눈비가 오든지 내 알바 아니다

'무명씨'·고금가곡 192

재밌는 것은 유명씨의 작품은 대상이나 의미를 드러내는 부분도 있지만 간접적이고 소극적인 표현이 많은 반면에 무명씨의 작품은 솔직하고 직접적이고 대범한 표현이 많다. 시조가 나온 지 오래되어 작자 미상인 경우도 있겠지만 일부러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읊은 시조도 꽤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복면가왕'이 있는데 이름이나 얼굴을 가리면 사람들은 훨씬 대담해진다는 게 진리인 듯하다.

바둑이, 검둥이, 청삽사리 중에 저 노랑 암캐같이 얄미울까

미운 임 오면 반겨 내닫고, 고운 임 오면 캉캉 짖어 못 오게 한다

문밖에 개장사 가거든 칭칭 동여매어 주리라 '김수장金壽長'·교주 해동가요 543

나도 모르게 깔깔 웃고 만 작품이다. 개도 질투를 하는가? 아니면 짓궂은 개인가? 주인 입장에서 보면 얄미울 만도 하리라. "개 사요~ 개 삽니다!"하는 개장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뭐든 눈치껏 살아야 귀염도 받고 제명대로 사는 법인데 사람도 동물도 더러 눈치 없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오늘도 날이 저물었도다. 저물면 다시 날이 샐 것이로다

날이 새면 이 임 갈 것이로다. 가면 못 볼 것이니, 못 보면 그리워하려니, 그리워하면 병이 들려니, 병이 들면 살지 못하리로다

병이 들어 내가(작자) 못 살 것 같으면 나와 자고가면 어떻겠는가

'무명씨'·진본 청구영언 506

그리워하는 마음은 처음엔 작았더라도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진다. 그렇게 되면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사설시조에는 같은 사랑을 읊더라도 앞부분의 평시조보다 훨씬 자유분방하고 외설적이다. 현대시나 소설에서보다 더 노골적인 표현이 상투 틀고 뒷짐 지고 다니던 사람에게서 나왔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한시미학산책'이나 '고문진보' 같은 책이 동양적인 정신을 배울 수 있다면 이 책은 우리 선조들의 일상에 좀 더 깊이 들어가 그들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손인선 학이사 독서아카데미 회원

손인선 작
손인선 작 '진주 유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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