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쑥, 따분하다. 어제 갔던 길을 오늘 걷고, 내일도 이 길을 걸을 게 뻔한 일상에 하품이 난다. 새로움을 꿈꾸지만 두려움에 선뜻 다른 길로 가지 못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같은 삶에 안주하면서 생뚱맞은 생각을 하는 게 어이없어,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수필집 '랑겔한스 섬의 오후'에 쓴 '소확행',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중얼거렸다.
베란다 문을 열었다. 며칠 계속 되던 미세먼지가 말끔히 사라져 공기가 상쾌하다. 내 인생에도 답답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나날만 있었겠는가? 황홀했던 순간도 분명 있었다. 먹은 적 없는 까마귀 고기 먹은 듯, 다만 까먹고 있는 것이다
심심풀이 땅콩 찾듯 책꽂이를 뒤적뒤적 번쩍, 눈에 띄는 책을 찾았다. 따분함을 한 방에 날려 버릴 것 같은 제목에 끌려 첫 장을 넘겼다.
성석제의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에 실린 32편의 단편을 읽는 내내 키득키득 웃었다. 에둘러 억지 감동을 이끌어내지 않는다. 이웃사촌들의 이야기 같고, 내가 경험한 이야기가 같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격식 따윈 신경 안 쓴 듯, 부조리에 대한 비판과 풍자에 속이 시원했으며, 평범한 사람들의 진실한 사랑에 동화되었다.
"아, 아, 이 마이크가 왜 이카나. 아, 아, 원투스리포오, 아, 뒤에 잘 들리십니까. (뒷줄 : 뭐 기양도 들리는구만 마이크는 뭐 하러 싸싸 전기만 닳구료) (26쪽)
'당부말씀'은 구수한 사투리와 시골의 정이 물씬 느껴진다. 소리 내어 읽으니 말맛이 살아났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 나는 무심코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사람 크기만 한 세. 비. 리. 라는 글자, 이어지는 거대한 온천마크 그리고 그 아래에 사람 주먹만 한 작고 검은 글씨는 '식 대중목욕탕'이었다." (46족)
한참 웃었다. 온천 인 줄 알았는데 온천식 대중목욕탕이란다. 주인공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다가 낭패를 본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어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모든 순간이 번쩍 거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인생의 황홀한 어느 한 순간은 인생을 여는 열쇠구멍 같은 것이지만 인생 그 자체는 아님을" (231쪽)
성석제는 1986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1995년 '문학동네>'여름호에 단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발표하며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다. 대표작으로 '소풍',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홀림', '호랑이를 봤다', '투명인간' 등이 있다.
따분한 오늘 나는, 출근해서 어둠이 가시지 않은 거리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과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었고, 가로수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소리에 미소 지었고, 매화나무가지 몽글몽글 황홀한 순간도 보았다.
2월은 어영부영하다 보면 훌쩍, 지나간다. 명절이 있는 2월은 더 빨리 지나간다.
남은 2월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
웃으며 보내자! 재미있는 책을 읽으며 활짝 웃음꽃 피워보자! 봄꽃이 무색하게.
최지혜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