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안창호, 윤봉길, 안중근 등 '독립운동 열사'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름들은 모두 남성이다. '여성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것은 아우내 장터에서 태극기를 나눠주며 3·1운동을 주도한 유관순 열사 정도다. 하지만 당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는데는 남녀가 따로 없었다. 매일신문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구여성가족재단의 도움을 받아 지역에서 활약했던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세차례에 걸쳐 소개한다.〈편집자 주〉
대구 독립운동사에 신명여학교(현재 신명고·성명여중)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신명여학교는 대구경북 독립만세운동의 주역의 산실로, 이 중 임봉선과 이선애, 유인경, 차보석 등은 신명여학교 교사로서 여성 독립운동사에 족적을 남긴 4인방으로 꼽힌다.
3·1운동 100주년을 며칠 남기지 않은 2월 하순, 전국 최초의 여성탐방로 '반지길'을 만든 대구여성가족재단과 함께 대구 여성들의 독립운동 흔적을 찾아 나섰다. 취재에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담은 성화여고 동아리 'CTW'(Change The World) 김채영 ·이예림·권수현(17) 양이 동행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주독립"…임봉선과 이선애
1919년 3월 8일 서문 밖 시장에 모인 1천여 명 군중 속에는 신명여학교 재학생과 졸업생 등 전교생 50여 명이 섞여 있었다. 이들은 고작 14살부터 20살 남짓의 10대 소녀들이었다.
여학생들의 봉기 뒤에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제의 압제 밑에 있는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이라고 독립운동 참여를 권유했던 신명여학교 교사 임봉선과 이선애가 있었다. 당시 이들의 나이도 만 22세에 불과했다.
기록에 따르면 서울과 평양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에서 여성의 활약상을 전해 들은 두 교사는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이들은 학생들과 함께 8일 오후 3시 서문밖시장에 모인 시위대와 함께 경찰의 제지선을 뚫으며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와 만경관, 종로를 거쳐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까지 행진했다.
시위대는 6대의 기관총을 설치해놓고 대기 중이던 일본군 80연대와 대치하자 행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곧 일본군 기마 헌병의 무자비한 진압 작전에 임봉선과 이선애는 온몸이 터지고 깨졌다.
3·1만세운동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임봉선과 이선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계단 중턱에는 1918년 신명여학교 졸업생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로 옅은 미소를 띤 임봉선과 이선애가 얼굴이 걸려있다. 물끄러미 현판을 응시하던 김채영 양은 "과연 나라면 용기를 내 거리로 나설 수 있었을지 묻게 된다"고 했다.
지난 2007년 신명학원 개교 100주년을 맞아 문을 연 신명역사관에도 이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역사관 한켠에는 만세운동길에 걸려 있던 졸업 사진과 함께 임봉선의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 국가유공자증(1993년)이 전시돼 있다. 임봉선은 3월 8일 시위 현장에서 체포돼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구금됐었다.

◆대한애국부인회 대구지부장 유인경, 교단에서 통곡한 차보석
임봉선, 이선애보다 앞서 신명여학교의 교편을 잡았던 유인경(1896~1944)은 1919년 비밀결사 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통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유인경은 거창과 밀양, 통영을 총괄하는 대구지부의 수장을 맡으며, 그해 7월에는 본부에 100원(현재 약 1억원)의 독립운동자금을 내놓기도 했다.
유인경의 흔적은 신명여학교의 역사를 정리한 '신명백년사'에서 찾을 수 있다. 유인경은 1915년 동료 백신칠 선생과 시험지 두 장을 접어 만든 문예지 '꽃망울'을 발간했다. 여기에 실린 학생 이선애의 작품 '여학생'에는 "검정치마 흰 저고리 갑사 댕기는 이 나라의 생기이라오, 여학생의 자랑이라오"라고 쓰여있다. 유인경은 1919년 11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활동이 발각돼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차보석(1892~1932)은 신명여학교 출신 중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다. 차보석의 오빠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동암 차리석이다. 평안남도 출생의 차보석은 신명여학교 교사로 초창기부터 1915년까지 재직하며 초기 교풍을 세웠다. '신명백년사'에 따르면 차보석이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 발표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교단을 치며 울분을 토하자 학생들이 엎드려 함께 통곡했다고 전한다. 차보석의 흔적은 신명여학교 교가에서 찾을 수 있다. '만세만세 신명학교'를 외치는 신명여학교 교가는 차보석이 가사를 썼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따라 다니던 CTW 동아리 학생들은 청라언덕 초입의 기념공간에 멈춰 섰다. 대형 문 형태로 조성된 기념공간에는 3'1운동 당시 일제에 항거했던 학생들을 그린 벽화와 대구 대표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새긴 기념벽이 마련돼 있는데 34명 중 여성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취재에 동행했던 권수현 양은 "대구에 여성 독립운동가가 이렇게 많은데 기념벽에는 단 한 명의 이름도 없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최세정 대구여성가족재단 연구위원은 "임봉선 등 대구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남성에 비해 공적이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제라도 관할 지자체인 중구청과 대구시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했다.
도움말=대구여성가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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