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을 흐르는 하천에는 봄이 먼저 온다. 시원한 물소리와 하천 주변의 녹음, 그리고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들이 봄소식을 알린다. 대부분의 도시는 큰 하천을 끼고 있다. 최근 들어 도심을 흐르는 하천 주변에는 산책로와 체육공원 등이 조성돼 여유도 안겨다 준다.
전통시대 도시를 흐르는 하천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물류 교통과 하수 배출이었다. 1394년 10월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 결정된 것도 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 등 네 곳의 산이 동서남북으로 감싸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한강을 끼고 있어서 사방의 물산이 통하는 도시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점 속에도 약점은 있었다. 산에서 내린 물이 지대가 낮은 도심으로 흐르면서 물길이 남산에 막혔고 바로 한강으로 빠지지 못했다. 특히 홍수가 심할 때는 도성 안 전체가 물에 잠기는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었다.
주민들 의견 구한 후 공사 진행
이를 간파한 태종은 도심을 관통하는 개천(開川)의 준설 사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인식하고 청계천 공사에 착수했다. 태종 시대의 청계천 공사는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412년에는 공사 주관 본부인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해 보다 체계적으로 공사를 진행했고 삼남 지방의 역군(役軍)까지 동원하여 1개월여 만에 공사를 끝냈다.
주요 다리는 돌로 만들었다. 그해 2월 15일 실록을 보면 '하천을 파는 공사가 끝났다. 장의동부터 종묘동까지 문소전과 창덕궁의 문 앞을 모두 돌로 쌓고, 종묘동 어귀로부터 수구문(水口門)까지는 나무로 방축을 만들고, 대소 광통교와 혜정교 및 정선방(貞善坊) 동구(洞口)와 신화방(神化坊) 등의 다리를 만드는 데는 모두 돌을 썼다'고 했다.
태종의 뒤를 이어 청계천 준천 사업을 본격적으로 실시한 왕은 영조였다. 영조가 준천에 관심을 보인 데는 사회적인 변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상업의 발달에 따라 농촌 인구가 도시로 집중하면서 이들이 버린 오물이나 하수로 청계천은 점차 하수 배출의 기능을 잃어 갔다. 인구의 증가로 성 안의 벌채가 심해지면서 토사가 청계천을 메워 홍수 피해의 우려는 한층 심각해졌다.
영조는 준천 공사를 통해 홍수 피해를 방지하는 한편 도시화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자 했다. 영조는 공사의 시작 과정에서부터, 신하들은 물론이고 재야의 선비와 백성들까지 만나 의견을 구했다. 1752년에는 광통교에 행차하여 주민들에게 준천에 대한 의견을 직접 물었고 1758년 5월에는 준천의 찬반 여부를 물은 후 구체적인 방안들을 계획해 나갔다.
본격적인 준천은 1760년 2월 18일 시작되어 4월 15일에 종료되었다. 57일간의 공사 기간 동안 21만5천여 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다. 도성의 방민(坊民)을 비롯하여 각 시전의 상인 등이 포함됐다. 지방의 자원군(自願軍), 승군(僧軍), 모군(募軍) 등 다양한 계층의 백성들도 참여했다.
실업 상태의 백성 6만3천여 명은 품삯을 받기도 했다. 대략 공사 기간 동안 3만5천 냥의 돈과 쌀 2천300여 석의 물자가 소요되었다. 영조는 청계천 공사 완료 후 수표교(水標橋) 표석에 '경진지평'(庚辰地平) 네 글자를 새겨 개천 준설의 표준을 삼도록 했다. 1760년에 공사가 완성되었음을 표시함과 함께 한 글자라도 흙에 파묻히면 후대의 왕들이 준천을 실시할 것을 당부한 것이었다.
민심 보듬는 4대강 물길 사업을
봄이 무르익고 있다. 왕과 백성이 소통하며 대규모의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청계천 공사의 기억을 떠올리며 4대강 물길 사업도 태종과 영조 등 역대 왕들이 펼친 치수 사업처럼 국민을 위하고 민심을 보듬는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도심 속 휴식 공간인 강과 하천으로 봄나들이에 나서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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