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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박소유 지음/시인동네 펴냄

너에게 모든 것을 보여 주려고
너에게 모든 것을 보여 주려고

박소유 시인이 세 번째 시집 '너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를 펴냈다. 박 시인은 1988년 20대에 신춘문예를 통해 화려하게 등단했지만 시집을 자주 펴내지는 않았다. 이번 시집은 두 번째 시집을 출간하고 9년 만이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사랑과 기억이다. (박 시인이 말하는 '사랑'은 시인이 살면서 만났던, 그리고 기억에 각인된 '모든 것'을 지칭한다. 그러니 '사랑'을 다른 낱말로 대체해도 무관하다.)

'기억'은 명백히 과거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과거를 짚고 섰으니, 지난날은 어쩔 수 없이 현재형이다. 그 옛날 듣던 그 노래가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고 흔히 말한다. 못 생긴 남자도 어떤 여자에게는 미남일 수 있고, 시든 꽃도 어떤 이에게는 장미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를 사랑한다면, 모든 사람이 배척하더라도, 그는 사랑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이 너그러움에 기대어 살아간다. 하지만 박소유 시인은 이 너그러운 '상호주관성'을 가볍게 무시해 버린다. 시인은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아도, 기억해주지 않아도 달라질 것은 없다'고 말한다.

박소유 시인 매일신문 DB
박소유 시인 매일신문 DB

'숲에서 새가 걸어 나온다고 이상할 건 없다 새가 날개로만 이해되는 건 아니다 날지 않는다고 새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중략) 내 모든 걸 버린다고 이상할 건 없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은 기억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미니멀리즘-

시인은 새가 날지 못한다고 해서 새가 아닌 것은 아니며, '과거를 버렸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세월을 따라 옛 사람(과거의 나)이 떠나고, 향기가 흩어지고, 마침내 기억마저 사라지더라도 '나는 나' 이고 '너는 너'이며, '그것은 그것'이라는 말이다.

다음 시 '멀어지는 것'은 아마도 시인이 자식들을 생각하며 쓴 작품일 것이다. (아직 어렸을 때) 아이는 엄마와 함께 꽃을 보며 서 있다가, 엄마의 손을 놓고 '엄마, 빨리 와요 이 길은 끝이 없어요'라며 앞으로 뛰어갔다.

(상략)'아이는 점점 멀어져 갔지만

나는 따라갈 수 없었다

단풍나무 한 그루가 내 뒷덜미를 꽉 잡고 있었다

상처가 없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사랑했던 날들은 거기서부터

멈추었지만

그건 세월 때문이 아니다/ (중략)

세상은 손에 잡힐 듯 가까운데

언젠가 놓쳐버린 아이는 다시 손잡을 수 없다

처음부터 내게는 손이 없어서

낮달보다 더 희미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 했다'

-멀어지는 것- 중에서.

아이의 손을 놓고, 다시는 잡을 수 없다고 해서 사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월을 따라 우리는 정직하게 떠나야 하고, 끝내는 사라지고 잊히지만 그것이 소멸을 의미하거나,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상략)'우리는 항상 다른 곳을 바라보지만 바라보는 자세만은 한결같아서

꽃필 때만 기다렸던 거지요

지금은 이곳도 복사꽃 만발한데

그곳은 어떤가요

비가 내려야 하는데 그게 또 무슨 상관인지

우리의 할 일이란

무심히 지나가는 것밖에는 무엇을 더 할 수 있겠어요' -구름의 시차-중에서

시인은 '복사꽃이 피든지든 무슨 상관인가. 우리가 할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심히 지나는 것밖에'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체념이나 납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랬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한세상을 지난하게 살아온 노인이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며 긴 한숨 내쉴 때, 그것을 납득이나 긍정으로 이해한다면 잘못 본 거다. 노인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을 향해 한숨으로 항거하는 중이다. 박소유 시인의 시가 그렇다. 136쪽, 9천원.

▶박소유 시인

서울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198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사랑 모르는 사람처럼' '어두워서 좋은 지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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