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창원의 기록여행] 만경관의 공짜 영화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나는 전회 무료로 생각하였으나 당국에서 너무 미안타고 해서 일원씩을 받게 된 것은 죄송타고 생각한다. 만일 당극장이 적산이 아니면 노동자들에게 가장 적은 요금으로 제공하는 사업을 하였으면 하나 적산인고로 여의치 못함은 유감이다.'(남선경제 1946년 9월 19일)

해방 후 식량난과 물가폭등의 민생고는 생각보다 극심했다. 곤궁한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 역시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기껏해야 구호품을 받는 외에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이렇듯 삶이 팍팍하다 보니 노동자들의 사기를 올리는 일이 필요했다. 경상북도는 극장을 무료로 개방해 노동자들이 영화 같은 대중오락을 즐길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다. 도는 이를 '민주주의적 노동정책'이라고 자화자찬했다.

당국은 참여 사업주의 협조를 구했고 극장은 만경관이 호응을 했다. 만경관은 한 달에 상영하는 영화 10편 가운데 2회는 공짜로 노동자에게 문을 열었다. 나머지 8회는 1원씩만 받기로 했다. 다만 영화를 볼 수 있는 관람시간은 제한을 두었다. 돈을 제대로 내고 보는 일반 관객의 불편을 생각해서다. 애초 만경관은 모든 영화를 노동자에게 무료로 상영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당국이 너무 미안하다고 해 1원씩을 받게 됐다고 극장 관리인은 인터뷰에서 밝혔다.

경북도가 무료 영화 관람을 추진하자 대구부도 가만있지 않았다. 끼니조차 걱정하던 그 시절, 노동자 전용 식당을 열었다. 부 후생과가 운영하는 직영식당이었다. 식량은 도 농상과로부터 공급받고 메뉴는 국밥 한 종류로 정했다. 날마다 평균 3천 명가량이 먹을 수 있도록 했다. 특히 한 그릇에 4원으로 가격이 정해지자 노동자들은 식생활의 큰 복음이 될 것이라고 반겼다. 그도 그럴 것이 그즈음 면 양말 한 켤레 40원, 여자 고무신이 180원 정도였다.

당국이 노동자들을 위해 공짜 영화 관람이나 식당 운영에 나선 것은 노동 환경이 일제강점기 때보다 나아지지 않은 데 따른 노동자들의 불만을 반영한 결과였다. 예컨대 해방 이태 뒤 대구전매국의 사례에서도 이를 가늠할 수 있다. 담배 생산을 책임진 대구 전매국은 남자 300명, 여자 400명 등 총 700여 명의 노동자가 일을 하는 큰 공장이었다. 노동자 700여 명 중 한 달간의 환자 수가 800명이나 되었다. 말하자면 한 달에 한 사람이 한 번 이상 아팠다.

앓아누울 정도의 병이 생기면 더 큰 문제였다. 치료비는 노동자 스스로 부담하고 전매당국에서는 아무런 보조가 없었다. 며칠 쉬면서 치료를 받으려고 해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상호부조기관인 공영회에서 8할의 치료비를 보조하고 급료도 일부 지불했다. 이러다 보니 해방 후의 노동 환경이 더 후퇴한 것으로 여겨졌고 노동자들의 불만이 갈수록 쌓였다. 병마와 생활고에 시달리는 노동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굶주림에 맞물린 경제난은 그렇잖아도 가난한 노동자의 삶을 더욱 나락으로 빠뜨렸다. 공짜 영화 한번 본다고 위안 받을 일이 아니었다. 그 시절, 눈앞에 닥친 현실에서의 '기생충'은 영화 '기생충'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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