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1운동 100년, 임시정부 수립 100년]경북도 "경북인 21명 선정해 매월 선양사업"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설치된 1천인 독립운동가 추모벽. 엄재진 기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설치된 1천인 독립운동가 추모벽. 엄재진 기자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과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경북에서는 10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다양한 행사와 사업들이 진행된다.

경상북도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3·1운동과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21명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해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양사업을 펴오고 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설치된 1천인 독립운동가 추모벽. 엄재진 기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설치된 1천인 독립운동가 추모벽. 엄재진 기자
김상덕

◆1월-부부독립운동가 김락과 이중업

1월의 독립운동가는 부부 독립운동가 김락(金洛·1863~1929)과 이중업(李中業·1863~1921)이었다.

이들은 안동 도산면 하계마을의 향산 이만도의 아들과 며느리다. 아내 김락은 1919년 3월 안동 예안면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붙잡혀 일제의 고문으로 두 눈을 잃었다.

남편 이중업은 심산 김창숙과 함께 파리장서를 주도했다. 이후 중국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려다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두 분의 공적을 기려 이중업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2001년 김락을 건국훈장 애족장에 각각 추서했다.

남계병
김상덕

◆2월-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김상덕 의원

김상덕(金尙德·1891~1960)은 고령군 대가야읍 저전리에서 태어나 1919년 일본 도쿄에서 2·8독립운동에 참여, 3·1운동의 서막을 열었다. 이 때문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20년 풀려난 김상덕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활약했다. 이후 만주와 중국 관내를 오가며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했으며, 이듬해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경북대표로 참여했다. 이어 활동무대를 만주로 옮긴 김상덕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조직부위원·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책임비서 등을 역임하고, 1934년에는 신한독립당 상무위원으로 활약했다.

이후 그는 1943년부터 1945년 11월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학무부차장과 문화부장으로 활동했다. 광복을 맞아 귀국한 그는 반민특위 위원장을 맡아 올바른 역사세우기에 앞장섰다. 이러한 공적을 기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정규하
남계병
이상룡
정규하

◆3월-영덕 만세운동 이끈 정규하·남효직·남계병

영덕에서 3·1운동을 이끌었던 정규하(丁奎河·1885~1968), 남효직(南孝直·1875~1954), 남계병(南啓炳·1877~1963).

3월 18일 영해면에서 군중 3천여 명을 이끌면서 독립만세를 이끌었다. 이는 영덕을 대표하는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들은 1919년 서울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고향 영덕으로 돌아왔다. 3월 15일 지품면 낙평리 교회 김세영 조사의 계획을 전달받은 이들은 17일까지 영해 독립만세를 준비했다.

약속된 3월 18일 오후 1시쯤 영해면 성내동 시장. 정규하·남계병·남효직은 준비된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주재소·학교·면사무소·우편소 등지에서 3천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붙잡힌 정규하는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남계병·남효직은 같은 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각각 7년형을 받았다.

이후 남계병은 1922년 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형을, 남효직은 8월에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세 분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정규하·남계병)과 건국훈장 애족장(남효직)을 각각 추서했다.

김동삼
이상룡
장석영
김동삼

◆4월-한국독립운동사 대표적 인물 이상룡·김동삼

4월의 독립운동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안동 법흥동 임청각 출생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과 국민대표회의 의장을 지낸 임하면 내앞마을 출생인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1878~1937)이다.

두 사람은 중국 만주에서 평생 동안 조국광복을 위해 노력한 한국독립운동사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만주망명 전 이상룡은 1905년 경남 합천 가야산에 의병부대를 양성했고, 1909년에는 대한협회 안동지회(지회장)를 만들어, 백성을 시민으로 일깨우는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김동삼은 1907년 내앞마을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고 교사로 활약했으며,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와 대동청년단에서도 활동했다.

1910년 8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다음해인 1911년 초 이상룡과 김동삼은 만주로 망명해 경학사·신흥무관학교·백서농장·서로군정서·한족회 등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운영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또 1919년 3월에는 대한독립선언서 대표 39인에 포함돼 완전한 자주독립을 선포했다. 또 김동삼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1923년 김동삼은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 활약했으며, 2년 뒤인 1925년에는 이상룡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취임했다.

정부에서는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상룡)과 건국훈장 대통령장(김동삼)을 각각 추서했다.

장석영

◆5월-파리장서 초안 작성한 장석영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 출신인 장석영(張錫英·1851~1926). 그는 1905년 을사5적 처단과 을사늑약 파기 상소투쟁에 참여했으며,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했다고 전해진다.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1912년 3월부터 6월까지 130일 동안 만주를 조사했으며, 이를 기록 '요좌기행'(遼左紀行)을 펴냈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장석영은 '파리장서운동'(제1차 유림단의거),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 초안을 작성하고 서명도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4월 9일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았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6월-임동 챗거리장터 만세 이끈 류연성

안동 임동면 수곡리의 정재종택 출생인 류연성(柳淵成·1857~1919)은 퇴계학맥을 계승한 대학자 정재 류치명의 손자다. 더불어 3대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집안이기도 하다.

아버지 류지호와 형 류연박이 안동의진에 참여했고, 조카 류동시와 류동저는 각각 3.1운동과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월 류연성은 조카 류동시로부터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자, 류동수, 류동태 등과 논의하고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3월 21일 오후 2시 임동 챗거리장날. 그는 군중 500명을 이끌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붙잡힌 류연성은 대구지검으로 이송됐고, 그해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받았다.

그리고, 류연성은 한 달이 지난 9월 25일 감옥에서 만 62세로 순국했다. 정부는 이러한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