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의 건강을 좀먹었나 봅니다. 이러면 지는 건데….'
저항시인 이육사. 1904년 안동에서 태어나 17세 때 대구에 와 17년을 살았고, 1927년 10월 18일 터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으로 첫 옥살이를 했다. 이후 열 여섯 번이나 더 붙잡히고 옥에 갇혔다. 1944년 1월 16일 중국 북경 감옥에서 40년 삶을 마칠 때까지 17차례나 체포 투옥 고문으로 온몸은 만신창이였다.
그의 이런 독백은 최근 발간된 고은주의 소설 '그남자 264'에 나온다. 시와 글을 통한 항일로는 모자라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원이 되어 무장투쟁으로 독립의 소원을 이루려 했던 그였다. 그러나 고문에 망가진 몸을 어찌할 수 없어 경주 한 사찰에서 요양할 때, 위로 방문한 서울의 한 서점 여사장에게 한 말이다.
그의 신음처럼 일제는 그랬다. 한국을 삼키고 먼저 한국인의 건강한 신체를 망치고 좀먹는데 나섰다. 매일 새 법령을 냈고 어긴 한국인을 처벌했다. 한국인에게만 적용되는 새 법(조선태형령)으로 다스렸다. 볼기를 때려 불구로 만들기 일쑤였다. 항일 뜻을 꺾고, 감옥도 덜 늘려 돈을 아낄 수 있었으니 딱이었다.
고문은 더했다. 혹독하고 악명 높았던 고문에 대한 공포는 착한(?) 한국인이 독립운동가를 밀고하게 만들고, 배신과 변절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마련이었다. 중국에서 의열단에 가입, 군사교육을 받고 귀국한 뒤 이육사가 또다시 붙잡힌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가까운 처남의 자수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남자 264' 속 이육사가 고문과 악형으로 끝내 목숨을 잃는 과정은 최근 벌어지는 일본의 경제 보복의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날, 한국인 몸을 망쳐 재기할 수 없도록 만신창이로 만들 듯, 이제 일본은 한국 경제의 가장 아픈 곳을 찾아 상처를 덧나게 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자 하는 속셈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 분명 옛날과 다르다. 한국의 겉은 건강하다. 속조차 그럴까. 경제, 소비도 그렇다. 올해 상반기 일본 차 3만 대 수입에 한국 차 수출은 32대였다. 차뿐이랴. 일본에 기대 우리 산업 체질과 맷집을 키우는 데 소홀하고 경제 독립의 뜻을 느슨히 한 결과이리라. 일본인 200만 명이 한국에 올 때, 일본을 찾는 700만 명 넘는 한국인에게 묻고 싶다. '일본 NO'라고 외치기만 하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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