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와 1993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소설가 이연주씨가 펴낸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단편 소설집 '그리운 우물' 포함하면 3번째 소설책) 뚜렷한 서사를 가진 작품으로 속도감 있게 이야기가 전개된다. 30대, 40대 소설가들이 선호하는 방식과는 좀 다른, 기승전결이 비교적 뚜렷한 '정통적' 소설이다.
◇ 각서를 훔쳐간 자는 누구인가
자수성가한 실향민이자 대한빌딩 소유주인 최대한은 불륜이 발각되자 아내의 분노를 무마하기 위해 '자신의 일흔 번째 생일날 모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한빌딩 소유권을 아내인 도축자에게 양도한다는 중대발표를 하겠노라'고 각서를 쓴다.
하지만 당일이 되자 최대한은 약속을 뭉개버린다. 이에 분노한 도축자는 남편이 쓴 각서를 넣어둔 봉투를 가족들이 모인 자리로 들고 나오지만 뜻밖에도 봉투 안에 든 것은 빈 편지지다.
아내 도축자는 최대한과 누군가가 각서를 훔쳐갔음을 직감하고, 사흘 내로 자수하지 않으면 경찰에 수사 의뢰하겠다고 선언한다. 최대한은 고명딸 최정혜를 시켜 도축자를 설득해보지만 실패한다. 사흘이 지나도 각서도, 각서를 훔쳐간 사람도 나타나지 않자 도축자는 행동에 옮긴다. 가족 중 유일하게 도축자의 말을 믿는 막내며느리 강지혜가 참다못해 자신이 범인을 밝혀내겠다고 자청한다. 그 때문에 강지혜는 가족들의 눈총을 받고, 고립무원이 된 가운데에서 범인 찾기에 고군분투하지만 범인은 오리무중이다.
자신의 종질이자 대한빌딩 관리소장인 도철식의 조언을 받은 도축자는 남편을 압박하기 위해 자신이 불륜 현장을 찍은 사진을 갖고 있는 것처럼 슬쩍 거짓말도 해보고 투신 쇼까지 벌여 보지만 먹혀들지 않는다. 남편 최대한은 자칫 흔들릴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죽마고우 박유식의 조언을 받으며 꿈쩍도 않고 버틴다.
도축자를 돕고 있는 관리소장 도철식은 초등학교 교장 출신으로 경우가 바른 장인환(최대한의 자형)에게 최대한의 불륜 사실을 제보한다. 처남의 비도덕적인 행실을 알게 된 장인환은 최대한을 신문(訊問)해 마침내 자백을 받아낸다.
그러나 남편의 자백 사실을 모르는 도축자는 자신의 힘으로는 최대한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가정의 평화를 지키고, 가족들의 온갖 눈총을 받고 있는 며느리 강지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착각했노라고 거짓 고백한다. 그렇게 최대한의 의도대로 해결되는 듯하지만, 마지막 순간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된다. 며느리 강지혜가 '과학적 수사'로 각서를 빈 편지지와 바꿔치기 한 사람을 밝혀낸 것이다.
◇ 알레고리 형식의 시대소설
이 소설은 알레고리(Allegory) 형식의 가족소설이다. '알레고리 소설'이란 표면에 드러나는 이야기와는 별개로 무엇인가 다른 것을 말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겉보기에는 약속 파기로 야기된 최씨 집안의 대립과 갈등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2016년 촛불 집회가 시작되던 시월 마지막 토요일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점, 요소요소에 당시의 정국 상황을 뉴스 형식으로 전달하는 점 등은 이 작품이 단순한 가족 이야기가 아니라 권력 다툼과 음모를 담고 있는 것이다.
특정인 1,2명을 주인공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도 이 소설의 특징이다. 중심인물 보다는 '각서'를 중심으로, 각서를 요구한 자, 각서를 쓴 자, 훔친 자, 찾으려는 자, 감추려는 자들이 제각각의 개성을 갖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한쪽은 사라진 각서를 찾으려 하고, 한쪽은 각서의 내용 자체를 부인하는 등 추리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써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한다.
이연주 작가는 "어쩌다 쓰게 됐다. 흔히 자식 농사만큼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없다는데, 내 경우에는 소설이 그랬다. 정작 쓰고 싶은 것은 써지지 않고,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것만 자꾸 써졌다. 소설도 사람처럼 운명이 있는 모양이다"며 이 소설은 '쓴 게 아니라 그냥 써졌다'고 말한다.
지은이는 "역사란 누군가가 끈질기게 일구어낸 진실의 힘에 의해 굴러가고, 그 힘은 순수성이 뒷받침되었을 때 보석처럼 빛난다. 이 소설을 통해 진정한 역사의 승리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완승이 아니라 다 같이 화합하고 포용하는 상생에 있음을 말하고자 했다."고 창작의도를 밝혔다.
359쪽, 1만 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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