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을 다시하자! 오늘은 우리나라가 간사 악독한 왜적의 침략으로 인해 아마 일본에 종속되게 된 영원히 잊지 못할 민족치욕의 날이다. 강도 일제는 2차 대전이 종결되는 날까지 반세기 가까운 장구한 세월에 걸쳐 온갖 간악한 수단과 시책으로 전동포를 압박하였고'(남선경제신문〈매일신문 전신〉 1948년 8월 29일)
오죽했으면 '강도 일제'라는 표현을 썼을까. 신문은 경술국치일에 간사하고 악독한 일제를 떠올렸다. 일제로부터 당했던 핍박에 대한 분노는 시간이 가도 사그라지기는커녕 어제 일처럼 또렷했다.
조선을 침탈해 저질렀던 온갖 악행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분노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조선 민중의 희망을 되살리는 일이 급했다. 그 첫 번째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일이었다.
'10시 53분, 미군공작자동차로 준비된 로뿌를 끊었다. 사람들의 눈은 돌문에 모였다! 움쭉 흔덕이는 큰 돌문은 끄는 힘에 철근으로 강하기 뭉치인 돌문도 어처구니없이 쓰러진다. 돌문 대지에 꺼꾸러진다.'(남선경제신문 1946년 8월 9일)
해방 이듬해 8월 8일 아침부터 달성공원 안에는 큰 태극기가 내걸렸다. 후텁지근한 날씨에도 아이와 어른 1천여 명이 모여들었다. 일제 잔재 소탕식에 온 것이었다. 일제는 대구부민의 안식소였던 달성공원에도 일본인의 신앙 시설인 신사를 들여놨다. 또 일인들의 이름을 새긴 돌문과 석등을 설치했다. 대구의 달성토성을 일제의 달성공원으로 만들었다. 이날 미군으로부터 장비를 빌려 신사 일부와 돌문, 석등을 무너뜨렸다. 만세의 함성이 터진 것은 당연했다.
일제의 상징물을 없애는 일은 예서 끝나지 않았다. 광복절 당일 시민들이 직접 나서 파괴한 대명운동장의 충령탑도 마찬가지였다. 충령탑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을 기리는 탑이다. 일제가 세운 충령탑을 그대로 놔둘 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 같은 일제 잔재의 청산은 더디게 진행됐다. 달성공원의 돌문과 석등 철거에서 보듯 장비의 부족도 원인이었다. 미군정의 역사 인식과 좌우의 정치적 대립 또한 일제 잔재의 청산을 뒤로 밀어냈다.
그럼에도 광복 첫해를 맞는 대구의 분위기는 감격 그 자체였다. 대구는 좌우 합작으로 해방 첫돌 행사를 준비했다. 좌우가 나뉘어 각기 행사를 치른 다른 지역과는 확연히 비교됐다. 대구역 광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의 사회는 일제강점기에 항일노동운동을 했던 최문식이 봤다. 이날 행사에는 역전 광장을 넘어 조선은행 앞까지 5만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당시 대구 부민이 30만 명 정도였으므로 열기를 가늠하고도 남는다.
기념식이 끝나자 여학생들이 선두에서 태극기 행진을 이끌었다. 거리 양쪽에는 경찰이 부민들을 보호하며 함께했다. 해방이 되었음을 실감하는 장면이었다. 광복 첫해의 감격은 달성공원의 돌문을 무너뜨린 것만이 아니었다. 좌우를 떠나 대구부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해방의 기쁨을 누린 것이었다. 구한말 국채보상운동의 데자뷔였을까. 그때 대구의 저력은 그랬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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