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서와 윤서는 두 살 터울 자매다. 초등학교 1학년인 현서가 학습을 영 못 따라간다며, 지적장애나 ADHD,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가 아니냐는 게 현서엄마의 걱정이었다. 낯선 진료실인데도 불구하고 둘이 장난치고 장난감을 던지고 하는 통에 정신 없긴 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검사결과를 보는데 현서는 말이 약간 늦을 뿐 신경발달은 잘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7살짜리 애가 가족안에서도, 또래 집단에서도 우울감이 높고 자존감이 대단히 낮은 것으로 나왔다.
보호자와 면담하고 외래 치료를 시작하면서 관찰한 결과, 어머니는 현서와 윤서를 대하는 태도가180도로 달랐다. 윤서가 뭘 잘못 하면 "다시 한번 해보자, 윤서는 잘할 수 있어" 라고 지지해 주는 반면, 현서는 조금만 장난을 쳐도 "넌 대체 어쩌려고 그러니!"라든가 "아이 귀찮아, 저리 가 있어!" 라고 아이를 내치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치료와는 별개로 현서엄마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현서에게 하루에 한번씩 스킨쉽하기, 하루에 한번 칭찬하기였다. 잊어 버릴까봐 냉장고에 달력을 붙여 놓고 매일 스티커를 두 개씩 붙여 오라고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두 달도 안되어 현서가 놀랄 만큼 차분해지고 치료 수행률이 드라마틱하게 올라가더니 그 나이에 해야하는 부분을 100%까지 해내는 거였다. 한 마디로 더 치료할 게 없었다.
면담 자리에서 어머니는 현서가 어릴 때 병치레가 잦았는데 남편이 도와 주지 않아 양육 스트레스가 컸다고 한다. 그게 익숙해 졌는지 늘 현서에게는 짜증이 먼저 난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의 말은 아이에게 칼이 되기도 하고, 꽃이 되기도 한다고. 엄마가 고작 하루에 한번 안아주고, 하루에 한번 칭찬하는 그 말이 아이를 피어나게 한 거라고. 두 달만에 좋아지는 걸 보면 현서엄마의 말은 정말 힘이 세다고, 그러니 이제는 그 힘을 칼로 쓰지 말고 꽃을 피우는 데 쓰라고.
굳이 아이를 키우는 일이 아니더라도 요즘은 꽃이 될 법한 일을 칼로 쓰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 것 같다. 물론 대한민국의 고도성장 뒤에는 갑질에 눈물짓는 을과, 힘없는 사람들의 숨죽인 희생이 깔려 있었지만, 이제는 공명정대한 세상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갑도, 을도 똑같이 누군가의 귀한 아버지, 딸, 소중한 친구가 아닌가.
하지만 때로는 나의 귀함, 나의 권리를 위해 누군가의 귀함이나 권리에 칼을 휘두른 적은 없는지. 내 생각이 옳다면, 그를 위한 방법은 어떠한 것이 되더라도 늘 옳다고 주장한 적은 없는지. 내가 상처입었기 때문에 너도 상처입어야 그게 정의라고 생각하진 않았는지.
고작 두 달만에 아이가 정상 수준이 되었다. 물론 치료도 열심히 받았겠지만 나는 현서엄마의 칭찬이 아이를 좋아지게 했다고 생각한다.
막히는 출근길 도로위에서 새치기 하는 차를 보며, 너무 시끄럽다며 뛰어 올라와 얼굴 벌개지는 아래층 이웃을 보며, 나의 상처를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세상의 칼잡이들에게, 나부터 먼저 칼이 꽃이 되는 일을 해 보리라 마음먹는다.
손수민 영남대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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