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신라왕이 아홉 번 찾아온 화원
낙동강이 흐르고 아래쪽의 강물을 따라 늘어선 버드나무, 깎아지른 절벽, 강가에 더 넓게 펼쳐진 하얀 모래사장, 숨찬 사공의 나룻배가 흐느적거리며 오가는 나루터, 습지에는 새들이 철마다 바뀌고, 어릴 적 소풍의 추억이 흑백사진으로 남은 화원.
이제 화원 사문진 나루터에는 여가를 즐기려는 시민들이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북적댄다. 신식의 주막촌과 커피 전문점이 들어서고, 낙동강에는 대형 유람선이 관광객들을 태운 채 물살을 가르며 질주하는 대구 최대의 명소가 됐다.
◆상화대(賞花臺), 화원의 기원
천상의 화원(花園). 신라 경덕왕이 가야산에서 병 치료를 위해 휴양 중이던 왕자를 문병 차 가던 중 갖가지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한 이곳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아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까지도 화원이라는 지명이 명맥을 잇고 있다. 화원동산의 꼭대기를 상화대(賞花臺)라 했고, 곧 상화대가 '화원'의 기원이 된 것이다.
당시 경덕왕은 귀족 세력 약화와 왕권 회복을 목표로 제도 개혁을 단행하면서 9주·5소경·117군·293현의 고유 지명을 한자로 고쳤다. 이때 설화현(舌火縣)이던 것을 화원현(花園縣)으로 개칭한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권34) 지리지 수창군조(壽昌郡條)에는 "화원현은 본래 설화현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는 기록이 있다.
경덕왕은 화원의 아름다움에 반해 무려 아홉 차례나 이곳에 들렀다 해 처음 지명은 구래리(九來里)로 불렸다. 또 그때마다 마을에 빛이 났다 해서 다시 구라리(九羅里)로 변천했고 지금의 이름으로 굳혀졌다.
어느 땐가 경덕왕의 아들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려 목숨이 경각에 달렸었다. 전국을 수소문한 끝에 나타난 내로라하는 명의도 왕자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
인근의 사찰에 불공을 드리러 간 왕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목을 축이려고 시종에게 맑은 물을 떠 오도록 했다. 그때 갑자기 건너편 계곡에서 찬란한 일곱 색깔 선명한 무지개가 섰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시종이 무지개가 선 곳으로 내달렸다. 그곳 바위 밑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시종은 그물을 길어 왕에게 올렸고, 왕은 그물로 왕자의 병을 낫게 했다. 그로부터 이 샘을 왕이 목욕한 샘이라고 해 '어욕천'(御浴泉), 또는 '무지개샘'으로 불렀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깝다.
◆어른, 아이들의 소풍 1번지
1960, 70년대 화원은 유원지로서도 유명해진다. 당시 화원유원지는 대구의 달성공원, 동촌유원지, 수성못 등과 함께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교통편이라고 해봐야 시내버스가 가장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놀이문화도 다양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학생들의 소풍, 동창회, 계모임 등 단체행사를 비롯해 단 둘만의 연인들도 찾는 곳이 화원유원지였다.
지금의 화원유원지 주차장 자리에 막걸리, 돼지고기 등을 파는 길거리 장사가 즐비했고, 유원지 소풍객들을 대상으로 한바탕 놀아주는 전문 풍물패도 한몫을 챙기곤 했다.
속칭 '방티쟁이'는 아예 가판대를 둘러메고 갖가지 주전부리를 팔러 다니기도 했다. 돼지를 직접 잡아서 와 가마솥을 걸고 국을 끓여서 먹는가 하면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장구를 치고, 춤과 노래로 일상에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특히 회사 등지에서 단체로 야유회를 올 때는 유원지 근처 식당에 미리 전화를 걸어 물어 본 후 식당에서 정해주는 날짜에 맞춰서 와야만 했다. 손님이 많이 몰리는 날짜를 미리 알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사진기가 흔하지 않아 화원유원지에는 주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는 '야외출사' 사진사가 10여 명이나 됐다. 손님들이 선호하는 배경은 주로 강변에 떠 있는 나룻배 등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렇게 사진을 찍어주고 받는 요금은 50~100원 정도. 한 통에 36장을 찍을 수 있는 필름으로 많이 찍을 때는 하루에 세 통까지 찍었다.
즉석 사진이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찍은 사진은 다시 대구에 있는 전문 현상소에 맡기거나 아니면 사진사가 직접 인화해 일주일에 한 번꼴로 집집마다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도선이 운항될 때만 해도 여름철이면 모래찜질을 하기 위해 대구 시민들이 사문진 모래사장으로 몰려들었다. 7~8월 혹서기에 모래찜질이나 낙동강 물놀이를 위해 사문진나루터를 이용한 사람이 한 달에 줄잡아 8천여 명에 이르렀다.
◆주막촌, 유람선이 손님 끌어
사문진에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고령과 인접한 창녕, 의령, 합천 등 영남권의 보부상들이 오가는 길에 꼭 들를 정도로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주막촌이 형성돼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술집과 식당, 여관을 겸한 곳이다. 지금도 사문진 주막촌에 남아있는 수령 500년 팽나무가 주막촌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사공들은 이 팽나무에 밧줄을 매 나룻배를 정박시켰다.
사문진의 주막촌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춘원관'의 경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후인 1948년쯤 건물이 헐렸다. 당시 춘원관 역시 '팽나무 주막'으로 통했을 만큼 팽나무 덕을 톡톡히 봤다고 한다. 춘원관은 1970년대 초에 다시 복원돼 대구 최초의 매운탕집으로 명성을 날리면서 이 일대 먹거리촌 형성에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1990년대에 들면서 뱃길 대신에 낙동강에 대형 교량인 사문진교가 들어서면서부터 옛사문진의 자취가 점차 쇠퇴 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나마도 겨우 명맥만 유지해오던 마지막 18곳의 음식점 등 상가들도 정부의 4대강 사업으로 문을 닫고 사문진을 떠났다.
달성군은 2013년 11월 옛 사문진 주막촌 자리(8천856㎡)에 다시 주막촌을 복원했다. 옛 정취를 되살리는 차원에서 한옥 구조의 건축물로 단장했다. 관리를 맡고 있는 달성군시설관리공단은 국수(4천원), 소고기국밥·부추전·두부(6천원) 등 10여 가지의 메뉴를 관광객들에게 먹거리로 제공하고 있다.
또 2014년 10월에는 낙동강 사문진에 72인승 유람선도 띄웠다. 현재 유람선 달성호는 사문진~달성습지~강정보~옥포신당마을~사문진으로 돌아오는 약 1시간 코스에 어른 1만원, 소인은 6천원을 받는다. 단체손님 20명 이상은 20% 할인해준다.
현재 사문진 주막촌에는 성수기(4~6월, 9~10월)에 관광객들이 대거 몰려와 하루에 약 2천만원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유명 관광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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