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중구 계산1가 출신의 송종익(1887~1956)은 안창호와 함께 미주 한인 사회를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부산·고베 등지에서 활판술과 제약법 등을 익히고 회사에서 서기로 근무하였다. 송종익은 1907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안창호가 창립했던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서기를 담당하면서 '공립신보'에 한국민이 단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는 글을 실었다.
그러할 때에 1908년 3월 23일 전명운·장인환이 친일 미국인 대한제국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송종익은 현지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한인공동회를 결성해서 두 의사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전명운·장인환의 의거는 자유전쟁 곧 독립 쟁취를 위한 독립전쟁이라고 선언하고 두 의사의 재판에 우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협력해 줄 것을 열변하였다.
이후 송종익은 미주 한인단체들을 통합한 대한인국민회에서 북미지방총회 서기에 선출되었고,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의 창립 단원이자 경상도 대표로 활동하였다. 동시에 그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여 임정 사무실을 새로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1932년 윤봉길의 의거로 인해 안창호가 체포되자,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을 중심으로 도산 구원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 후로도 송종익은 1941년 4월 29일 미주 한인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전선운동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재무를 역임하였고, 해방 이후 귀국하여 신진당을 결성해서 조국 재건을 위해 자주통일정부 수립운동과 흥사단 부흥운동에 주력하다가 재차 미국으로 돌아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현재 흥사단 대구지부(수성구 동원로1길 5)에는 1999년 대구 흥사단 창립 35주년 기념사업으로 송종익의 흉상이 건립되었다. 그곳을 방문하여 그가 미주에서 펼쳤던 독립운동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빛나는 항일정신을 체득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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