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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친소]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아'…느리지만 부지런한 달팽이

어른 손바닥 만한 달팽이가 있다니? 혜원 씨는 아프리카왕달팽이의 매력에 푹 빠졌다. 독자 제공
어른 손바닥 만한 달팽이가 있다니? 혜원 씨는 아프리카왕달팽이의 매력에 푹 빠졌다. 독자 제공
아프리카왕달팽이는 길이가 30cm 까지 자라는 육상 최대종으로 보통 식용으로 많이 사육된다. 독자 제공
아프리카왕달팽이는 길이가 30cm 까지 자라는 육상 최대종으로 보통 식용으로 많이 사육된다. 독자 제공

바야흐로 12월의 끝자락이다. 모두가 '빨리빨리'를 외치며 허겁지겁 달려왔다.

남들이 쉬어가면 앞서가고 싶은 욕심에 계속 걷고, 남들이 걸어가면 뒤처지는 것 같은 조바심이 들어 쉬어가지 못했다. 한 템포 늦게 간다고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가끔은 느리게 걷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느림의 미학이 아닐까. "느릿하게 움직이는 이 녀석을 보고 있으면 마음의 여유와 함께 힐링을 얻는다" 경상북도 영천시에 사는 최혜원 씨는 달팽이 키우는 재미에 푹 빠졌다.

느리지만 분명한 걸음으로 착실히 걸어가는 이 녀석은 바삐 서두르는 우리에게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아'라는 위로를 건넨다.

느리지만 착실히 걸어가는 달팽이
느리지만 착실히 걸어가는 달팽이 '느림의 미학'에 푹 빠져 버린 혜원 씨. 독자 제공

◆달팽이 껍질로 건강 상태·기분 확인

달팽이는 얇은 껍질을 둘러쓰고 태어나 자라면서 몸집과 집을 차근차근 늘여간다. 그러곤 다 완성된 견고한 집을 이동할 때마다 짊어지고 다닌다.

한평생 제집을 짊어지고 다니기에 이사하지 않아도, 내 집 마련을 위해 주택부금을 붓지 않아도 될 테다. 태어나자마자 건물주라니. 달팽이에게 부러움을 느껴보긴 또 처음이다.

하지만 이 집을 관리하는 건 달팽이가 아닌 오롯이 본인 노력이라며 혜원 씨가 쓴웃음을 짓는다. 혜원 씨는 본인을 달팽이 집사 혹은 입주 가정부 즈음으로 칭한다.

"이 녀석들 집 관리해주려다 내가 알을 낳을 판이다" 혜원 씨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계란을 삶는다.

난각 가루는 달팽이 패각(등껍질)을 단단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잘 말린 계란 껍질을 곱게 갈아 사육공간에 뿌린다.

칼슘을 보충해주면 달팽이 껍데기가 튼튼해져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패각은 달팽이의 건강 상태를 나타내는 지표와도 같다.

패각이 초록빛으로 변한다면 가습기를 켜 주며 습도 조절을 해야 하고, 살짝 깨지거나 금이 갔다면 계란 껍질 안에 붙어있는 흰 막으로 응급처치를 해야 한다.

달팽이 하면 시골에서 가져온 배춧잎에 옹기종기 붙어 있는 자그마한 생명체를 떠올리곤 한다.

어른 손바닥만큼 크는 달팽이도 있다는 말을 전하면 사람들은 "에이, 설마" 라고 말한다. 혜원 씨 또한 호기심 반, 설마 하는 기대감 반으로 달팽이 세 마리를 입양했다.

혜원 씨가 입양한 달팽이는 '아프리카 왕달팽이'라는 이름의 육상 최대종으로, 보통 높이 7cm, 길이 20cm 이상 자라며 가장 큰 개체는 30cm에 달한다.

특히 이 달팽이는 식용으로 많이 사육되고 있다. 하지만 혜원 씨는 오히려 이 녀석을 키우며 달팽이와 닮은 생물은 입에도 안 대게 됐다.

달팽이에 대한 애정이 입맛까지 변화시킨 것일까. "같은 복족류인 골뱅이, 다슬기, 우렁이는 가급적 안 먹는다.

괜히 동족을 먹는 듯한 죄책감도 들고, 이리 팽이의 백발(배 아래 있는 근육)을 만지다 보면 자연스레 그런 음식들엔 손이 안 간다"

에호박, 당근, 상추 등에 단백질·난각가루를 함께 뿌려주는 것은 껍질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독자 제공
에호박, 당근, 상추 등에 단백질·난각가루를 함께 뿌려주는 것은 껍질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독자 제공

◆예민한 성격·까다로운 식성의 소유자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틀어박힌 지 며칠째. 하루 종일 무얼 하는지 좋아하는 반찬을 차려놓아도 밥 먹을 생각은 일절 없다. 한 숟가락도 안 뜨는 자식 걱정에 부모는 시름시름 앓다 못해 죽을 지경이다.

결혼을 하기도 전에, 제대로 된 육아를 해보기도 전에 혜원 씨는 사춘기 자녀를 키우는 싱글 맘이 돼 버렸다. "기분이나 몸이 좋지 않을 때면 제 집인 껍데기 속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안 한다. 또 입맛은 얼마나 까다로운지 조금이라도 딱딱하거나 향이 있다 싶은 음식엔 입도 안 댄다"

혜원 씨는 매일 눈으로 달팽이의 건강, 발색, 패각 상태 등을 확인하며 밀도 있는 관심을 쏟는다. 기온이 내려가면 동면을 하는 달팽이 특성상 사육 공간의 기온은 늘 20~30도로 유지해야 한다.

온도뿐만 아니라 습도도 중요하다. 달팽이는 어둡고 축축한 곳을 좋아한다. 습도는 7~80% 정도가 좋고, 달팽이 전용 흙(코코피트)이 항상 수분을 머금도록 분무를 해야 한다. 혜원 씨의 관심 덕에 엄지손가락 만했던 녀석은 무럭무럭 자라 손바닥 크기만 해졌다. 애정 쏟은 만큼 덩치가 커져가니 실로 키울 맛이 난다.

식사 시간이야말로 쏟은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는 절정의(?) 순간이다. 달팽이는 음식물은 소화하고 흡수시키지만 색소를 분해하거나 흡수하지 못해 먹이의 색소를 그대로 변으로 내보낸다.

"기분이 좋을 땐 더듬이를 빼꼼 내민다" 반려인들은 달팽이 생김새 곳곳에서 매력을 발견한다. 독자 제공

◆교감 못 해도 보는 것 만으로 위안

달팽이 정보 공유 카페에 "달팽이의 매력이 뭘까요?"라는 글을 올렸더니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수십 개 댓글이 올라왔다. "기분이 좋을 땐 더듬이를 빼꼼 내민다", "미어캣처럼 얼굴을 내미는 게 애교가 많다" "성질이 날 때 얼굴을 쭉 뻗는 게 귀엽다" 내 새끼 자랑하는 회원들의 팔불출에 웃음이 지어지다가도 '달팽이도 감정이 있나?' 의문이 들었다. 혜원 씨 또한 달팽이와의 교감은 일방이 아닌 쌍방이라 목소리 높이며 달팽이 감정설(?)에 무게를 실었다.

반려인들의 아우성이 무색하게도 사실 달팽이에겐 2개의 뇌세포 밖에 없다. 달팽이에겐 배고프냐 안고프냐, 음식을 먹을까 말까. 구별하는 뇌 밖에는 없다는 것.

얼굴을 빼곡 내밀고, 껍데기 속으로 쏙 들어가고, 반가운 듯 더듬이를 들어올리는 건 본능에 의한 행동이지 감정이 깃든 것이 아니다. 감정이 없어도, 교감을 할 수 없더라도 달팽이는 보는 것 만으로 위안이 된다.

느리게 걷는 녀석들을 보고 있노라면 반려인 삶에도 여유가 스며든다. "집 안을 돌아다니며 먹이를 먹고 간혹 흙에 들어가서 잠을 잔다. 조금 느리지만 부지런히 움직이는 걸 보고있으면 내 마음이 참 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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