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용섭의 북한 화첩기행] <13>그리운 금강산 그러나…

금강산유람선 타고 38선 넘어가…50년 철벽을 붓으로 무너뜨려
이젠 금강산 진경 펼쳐 보일 터

동해( 묵호)항에서 북한 장전항으로 떠나는 현대금강호
동해( 묵호)항에서 북한 장전항으로 떠나는 현대금강호

금강산 관광을 거론한다는 것이 정치적 논쟁에 휘말릴 수 있는 시대다. 개인적으로 인간들의 옹졸한 이권 탓에 창조주가 빚어놓은 절세의 비경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자연을 사랑하는 화가로서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연은 누구나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은 이산가족 상봉, 남북회담 등을 거치며 북한과의 교류 턱이 비교적 낮아졌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1998년 금강산 첫 개방때 현지케치를 떠난 필자.
1998년 금강산 첫 개방때 현지케치를 떠난 필자.

1998년 1월 1일, 서울 S방송국의 신년특집 오락방송 프로그램에서 나에게 새해 소원을 들어보겠다고 인터뷰 섭외가 왔다. 내가 수년 전부터 금강산 실경그리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소문이 흘러 들어갔는지, 기자가 "올해는 금강산에 그림 그리러 가겠다고 말하라"고 귀띔했다.

기적적으로 그 해 11월, 나는 남북의 온갖 무기가 대치하고 있는 38선을 배를 타고 유유히 넘어갈 수 있었다. 반공시대를 살아온 나에게는 그야말로 기적의 여행이었다. 50년의 철벽을 붓으로 무너뜨린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일들이 겹쳐있었다. 그 무렵 나는 '한국의 미'라는 테마로 전국의 사찰을 다니며 불교 미술 양식을 공부하고, 사찰과 돌탑, 석물 등을 그리곤 했다. 그 영향으로 딸 아이도 불교재단의 유치원에 다니게 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아이의 유치원을 찾아 행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가 귀가 아프다며 데굴데굴 굴렀다. 병원으로 가자는 나에게 아이는 자꾸만 울면서 교회로 가자고 보챘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찾은 교회가 나에게는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됐다. 그날 난생 처음 들은 설교에서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이 옮겨진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방북을 위해 기도를 시작한 것. 그 기도의 끝에 마침내 금강산을 찾을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사실 이전에도 금강산에 가보고 싶다는 나의 소망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 충족되기도 했다. 어느 잡지에 '금강산 가는 길'을 연재할 당시였다. 처음으로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하고 돌아오다, 집 앞 쓰레기 분리수거함에 버려진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 사진작가 구보다히로지의 '금강산 사계'라는 사진집이었다. 당시 나는 그러한 금강산 자료를 얻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하고 있었다.

특히 그 때는 그림으로라도 북한을 넘겨다본다는 것이 자칫하면 오해를 받을 수 있고, 국가보안법에 걸리기라도 하면 젊은 인생을 접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할 만큼 시대 분위기가 엄격했다. 때문에 더욱 짜릿한 모험이었다.

어느 날 일본 오사카에서 스케치 여행을 하던 중 우연히 방문한 집에서 북한에 대한 책이 수두룩한 것을 발견했다. 조청련계 사람이 살던 집이었는데, 이름만 들어도 섬뜩했던 '김일성 수령의 60돌 기념 화집'까지 펼쳐 금강산 배경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중국 도문에 방문했을 때도, 두만강 쪽에서 북한 물건을 파는 한 아가씨로부터 '금강산'이라는 비디오테이프를 제목만 보고 산 적이 있다. 집에 가져와서 보니 영상만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시사물이었다. 차가운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북한색이 짙은 내용을 말했다. 혼자 보기에는 다소 아까운 느낌이 들었지만 누구에게 보여주기도 뭣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 때는 열정이 넘쳤다. 특히 새벽기도를 한 날 80여 쪽이나 되는 '금강산 사계' 화집을 얻은 것이 신기한 체험이었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새벽기도를 며칠 더 다녔는데, 더욱 놀라운 기적이 생긴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금강산관광유람선이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갑작스러운 발표를 대부분의 국민들이 믿지 않을 정도였다. 나 역시 뉴스에서 놀란 눈을 뗄 수 없었다. 곧장 대구 달서구청으로 가서 방북신청을 했다.

사진과 각종 서류를 준비해 신청서를 접수하고 나왔다. 금강산 방문을 애타게 기다려온 나에 비해, 담당자의 태도는 마치 '젊은 놈이 어지간히 할 일 없는 모양이다'라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몆달 후 통일부에서 통보가 왔다. '우리 정부의 뜻을 모아 입북 요청을 했으나 북측에서 허락하지 않아 유감이며, 다음 기회에 귀하를 우선적으로 방북 허락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첫 신청은 불발됐지만, 결국 꿈은 이뤄졌다. 이제부터 그 때 보고 느낀 금강산의 진경들을 펼쳐보려고 한다.(계속)

권용섭 독도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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