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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습니다] "함께 살아 돌아오지 못해 미안한 전우들에게" 대한민국 최초 카투사 류영봉 씨

류영봉씨가 자신이 투입됐던 작전 지역을 지도로 그려 설명하고 있다. 본인제공.
류영봉씨가 자신이 투입됐던 작전 지역을 지도로 그려 설명하고 있다. 본인제공.

"전장을 함께 누볐지만 살아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에게 미안함이 듭니다."

1일 대구 남구 봉덕동에서 만난 류영봉(UN군 미 7사단 참전 카투사(KATUSA)유공자회) 씨는 "전장에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전우들을 평생 가슴 속에 담고 살아왔다"며 이같이 말했다.

류영봉 씨는 6·25 전쟁 당시 이등중사로 활약했다. 그는 지난달 25일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6·25전쟁 70주년 행사에서 대통령에게 한국으로 귀국한 국군 전사자 147구를 대신해 문재인 대통령에게 복귀 신고를 한 인물이다. 이날 유해로 고국에 돌아온 용사 중에는 류 씨의 카투사 입대 동기인 고 김정용 일병도 포함돼 있었다.

지난달 25일 류영봉씨가 유해로 돌아 온 전우들을 대표해 문재인 대통령에게 복귀신고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지난달 25일 류영봉씨가 유해로 돌아 온 전우들을 대표해 문재인 대통령에게 복귀신고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류 씨는 "유해으로 돌아온 전우들을 대표해 복귀 보고를 할때 모두 살아서 복귀 신고를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살아남아 대신 복귀 신고를 하는 것이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류영봉 씨가 함께 근무한 미군이 보내온 편지를 소개하고 있다. 본인제공.
류영봉 씨가 함께 근무한 미군이 보내온 편지를 소개하고 있다. 본인제공.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카투사로 50년 8월 16일 대구 원대동에서 살았던 그는 학교 등교중 동인동에서 입대하게 됐다. 카투사는 1950년 하반기 미군의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징집된 한국군이다. 이들에게는 'K'로 시작하는 군번이 부여됐다.

당시 학생 신분이었던 그는 "키가 충분해 입대해야한다"는 말을 듣고 군용트럭에 몸을 실었다. 그는 집에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못한채 그렇게 전쟁터로 가게됐다.

미 7사단으로 입대한 그는 부산항을 거쳐 일본 후지산 인근에서 3주간의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후 그는 미 7시단 17연대 의무대원으로 소속돼 인천상륙작전 등 전장에서 부상 당한 장병들을 치료하며 미군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1952년 류영봉 씨와 서재용(오른쪽) 씨가 전장에서 찍은 사진. 본인제공.
1952년 류영봉 씨와 서재용(오른쪽) 씨가 전장에서 찍은 사진. 본인제공.

그 과정에서 7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전우를 만나게 됐다. 그의 이름은 서재용이다. 류영봉 씨는 "같은 지역에서 입대해 알게된 한 살 많은 형과 수많은 전장을 누볐다"며 "그가 없었다면 나도 지금 잘 살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칠봉 전투에서 박격포 파편이 손에 박혀 다쳤을 때 서 그 형이 직접 내 손에 붕대를 감아 치료해줬었다"며 "아직도 그 상처가 남아 있는데, 상처를 볼때면 서형이 더욱 보고 싶어진다"고 덧붙였다.

류 씨는 "서 형도 담배를 피지 않아 전우들이 담배를 필때면 조용히 다른 곳에서 둘만의 시간을 가지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며 그와의 추억을 회상했다.

하지만 1953년 7월 휴전이 되면서 이들의 인연도 끝났다. 류 씨는 "휴전이 되면서 서 형은 한국군이 있는 부대로 발령이나 헤어지게됐다"며 "친형의 가르침에 따라 학창시절 영어사전을 가지고 다니며 공부를 열심히하다보니 남들보다 영어가 능통해 자연스럽게 미군부대에 그대로 남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휴전 이후 소식을 듣지 못해 항상 그리운 사람'이라며 "살아 있다면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덧붙였다.

1963년 대구 미군부대에서 근무 중 찍은 류영봉 씨의 모습. 본인제공.
1963년 대구 미군부대에서 근무 중 찍은 류영봉 씨의 모습. 본인제공.

그는 군 전역 후 지난 1958년부터 대구 미군부대 병원에서 근무해오고 있다. 2004년 임기를 마쳤지만 그는 무려 5천974시간이나 이곳에서 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류 씨는 그동안 단 한번의 결근도 없이 근무해왔기에 성실한 그의 능력을 인정해 봉사를 이어올 수 있었다. 그는 "먼저 떠난 전우들 몫까지 몸이 움직이는 한 국방을 위해 일하고 싶다"며 "분명 이러한 봉사가 국가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그는 민간 외교관으로써의 역할도 이어가고 싶다는 소회도 밝혔다. 그는 "나라를 사랑하는 만큼 한미 친선도 잘 쌓여 나가길 바란다"며 "남은 삶 동안 최선을 다해 한미교류의 가교역할을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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