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재미있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자신은 "86세가 아니라 두 번째로 맞는 43세"라고 소개한다. 85세에 첫 책을 쓴 후 두 번째 책을 쓴다면서 "늙음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고, "나이 드는 것은 성숙해지는 것이다"고도 한다. "올드 패션은 구식이나 낡은 것이 아니라 진짜(genuine)"라면서 한쪽 눈을 찡긋한다. 그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가 '그 나이에 첫 책을 쓴 사람'이어서였는데, 그가 잊히지 않는 이유는 '무지개가 연상되는 그의 양말' 때문이다.
손녀에게서 컬러풀한 양말을 선물받은 후, 서랍 속의 검정색, 회색, 감색 양말들이 마치 재미없게 산 지난날 같아 컬러풀한 양말만 신기로 했다고. 그를 만나면 사람들은 양말부터 쳐다보므로, 양말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궁금해서 말을 걸어오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겁다고 했다. "아프고 힘들다는 말만 하는 노인은 피하고, 밝고 긍정적인 노인은 달려가 안부를 묻는다"는 친구 미셸의 말이 생각난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일도 하게 만드는 게 양말인지도 모르겠다. 그 나이에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날아가 간병인의 딸 결혼식에 참석하고 축하 연설까지 했다. 검정색 정장을 차려입고 화려한 형형색색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서! 나는 소리 내어 웃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진을 보면서 저절로 웃는 얼굴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훈데르트바서는 "왜 똑같은 양말을 신어야만 하냐?"고 반문하면서, 비인간적인 규율에 대한 저항으로 짝짝이 양말을 신었단다. 비엔나에서 그의 건축물을 보았다. 직선을 배제하고 곡선만으로 지은 서민 아파트에는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데, 집 안에서 나무가 자라고 창문 밖으로 나뭇가지가 뻗어나간다. 안과 밖의 의미가 허물어지고, 정해 놓은 것이 의심스러워진다.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세상을 본 듯 마음이 자유로워졌다.
내가 만난 할아버지 작가는 색색 가지 양말을 내게도 권했는데, 나는 그깟 양말 색을 바꾸는 데도 용기가 필요했다. 빨강 양말을 신으려니까 "어떻게 빨강 양말을!"로 시작해서, "어떤 옷에 어울리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로 이어지고, "너무 멋을 부린 것 같나?" "눈에 띄어서 쑥스러울 것 같아"까지 자잘한 생각들이 줄을 선다. 막상 신어 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아무 일'도 아니던데.
"정말로 명상적인 사람은 장난스럽다. 그에게 있어 삶은 재미이다. 그에게 삶은 하나의 놀이이다. 그는 삶을 엄청나게 즐긴다. 그는 심각하지 않다. 그는 이완되어 있다"라고 작가 오쇼 라즈니쉬는 말했다.
알록달록한 양말을 신으면 나도 모르게 어린아이처럼 될 것 같다. 평소보다 장난기 섞인 말을 하고, 표정이 다양해지며, 웃음소리도 커질 것 같다. 색색 양말을 신는 것이 나에게는 새로운 일을 해 보는 실험이자, 재미를 끌어내는 경험일지도 모르겠다. 변화를 선택하는 쪽과 경험이 풍부한 쪽이 훨씬 더 재미있다. 중요한 건 양말 색을 바꾸는 게 아니다. 지루한 과거로부터 작별하고, 다채로운 삶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거다. 익숙하고 편한 것에 안주하지 않고, 낯선 세계를 알아가는 거다. 나조차도 몰랐던 나를 여는 일이자, 새로운 나를 환영하는 일이다.
옥스퍼드에서 짝짝이 양말을 신은 남자를 봤다. "양말이 그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궁금했다. 며칠 후, 양말 가게에서 또 짝짝이 양말과 마주쳤다. 이번에는 양말에 붙은 글이 나에게 소리 없이 가르쳐준다. "Life is too short for matching socks." 양말 짝을 맞추면서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고, 입이 다물어졌다. 아들이 보낸 사진 속 손자도 짝짝이 양말을 신고 있다. "똑같은 양말은 재미없어"라며 세 살짜리가 짝짝이 양말을 신는단다. 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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