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덕현의 엔터인사이드] E채널 '노는 언니'

女 예능…박세리 주축 익숙한 스포츠 스타 "잘 놀아야 경기도 잘 한다"
잘논다…금기 풀린 듯 아침부터 고기 먹고, 마트 카트 두개 가득 채우며 쇼핑
멋있다…'여성스런' 외모 차별적 시선 대신 성공 위한 희생과 당당한 자신감

E채널
E채널 '노는 언니' 관련 사진. E채널 홈페이지 캡처

어째서 예능 프로그램에는 남성들만 가득할까. 이런 의문을 던져본 시청자라면 E채널 '노는 언니'라는 프로그램이 대단히 신선하게 다가올 법하다. 여성 스포츠스타들만으로 구성된 예능이 주는 특별한 세계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심상찮은 '노는 언니'

E채널 '노는 언니'의 첫 회는 어느 고깃집에 아침부터 '언니들'이 모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간단한 가방에서 거대한 트렁크를 끌고 오는 언니도 있고, 남자친구가 차로 내려주는 언니도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등장할 때마다 존재감이 남다르다. 다름 아닌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스포츠스타들이고, 그들이 모두 여성들이라는 점이 더욱 그렇다.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 박세리. 그가 사전 인터뷰를 통해 밝힌 출연 계기는 사실상 이 프로그램이 가진 기획 의도 그 자체나 마찬가지다. 그는 남성 스포츠스타들이 모여 하는 예능 프로그램들은 많지만 여성들은 거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노는 언니'가 각별하게 다가왔다고 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밝힌 것이지만, 그건 사실상 예능 프로그램에서 늘 지적되던 성비 문제를 정면에서 저격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JTBC'뭉쳐야 찬다' 같은 프로그램은 스포츠스타들의 '조기 축구'라는 콘셉트를 갖고 안정환, 이만기, 허재, 양준혁, 이봉주, 여홍철, 이형택, 박태환 등등 다양한 스포츠스타들을 출연시키고 있지만 여성은 단 한 명도 없다. 조기축구라는 특정 종목 때문이라고는 해도 스포츠스타 중에는 여성 축구인도 있을 텐데 어째서 단 한 명도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는지 의아하게 느껴진다.

'노는 언니'는 그래서 최근 대중들의 요구에 의해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 여성 예능의 중요한 계보를 잇고 있다. 2016년, 2017년 방영된 '언니들의 슬램덩크' 시즌1, 2나 송은이가 이끄는 '밥블레스유' 그리고 최근에는 MBC '나 혼자 산다'의 스핀오프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여은파'(여자들의 은밀한 파티)가 여성 예능의 계보다.

그 중에서도 '노는 언니'는 이제 겨우 몇 회 방영되지도 않았지만 반응이 뜨겁다. 그건 다름 아닌 여성 중에서도 '스포츠스타'가 출연하고 있고 이들이 말 그대로 노는 광경 자체가 지금껏 우리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봐왔던 여성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지점을 보여주고 있어서다. 아침에 고기는 필수라며 고깃집에서 고기를 챙겨먹고, 마치 금기가 풀린 사람들처럼 마트에서 카트 두 개를 가득 채워버리는 쇼핑만으로도 신선한 그림들이 나온다. 그 장면들은 우리가 별 생각없이 봐왔던 예능 속 여성 출연자들의 고정된 역할이나 이미지를 여지없이 깨주고 있다.

◆스포츠인이어서 할 수 없던 것들, 할 수 있는 이야기들

여기서 스포츠인이어서 할 수 없던 것들을 이 프로그램이 해준다는 콘셉트가 더해지면서 이들의 노는 모습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즉 스포츠선수였기 때문에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훈련만 하며 젊은 날을 훌쩍 지나보낸 그들은 심지어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단다. 예를 들어 수영선수 정유인은 매일 같이 수영을 했지만 물놀이는 해본 적이 없다고 하고, 피겨스케이팅 선수였던 곽민정은 몸무게 조절을 늘 달고 살아 마음대로 먹는 것조차 못했다고 한다. 훈련만 하며 청춘을 보내다 보니 스포츠선수로서 갖는 고충 같은 걸 나눌 수 있는 친구도 사귀기가 어려웠단다. 이러니 이들은 고깃집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고 간단히 수다를 떠는 것만으로도 쉽게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된다. 그건 스포츠인으로서, 그것도 여성 스포츠인으로서의 갖게 되는 공감대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철인3종 유망주였던 고 최숙현 선수의 극단적인 선택과 그가 남긴 일기를 통해 밝혀진 스포츠계의 현실에 대한 대중들의 정서는 '노는 언니'가 담는 메시지를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게 만든다. 즉 선수 시절에 연애도 금기였고 하다못해 맥주 한 잔 마시는 것도 못했던 걸 떠올리며 박세리가 "그 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던지고, 남현희 역시 너무 여유 없이 훈련만 했던 그 때를 떠올리며 지금은 교육자로서 학생들에게 여유를 가지라고 말하곤 한다는 이야기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들이 말하는 "잘 노는 것이 또 경기를 잘 할 수 있게 해준다"는 이야기들은 '노는 언니'의 '논다'는 의미를 새롭게 해준다.

E채널
E채널 '노는 언니' 관련 사진. E채널 홈페이지 캡처

◆'예쁜'이 아닌 '멋있는'이 어울리는 언니들

'노는 언니'가 시청자들에게 주는 카타르시스는 스포츠스타들이어서 더욱 도드라지는 성 역할 구분 없는 '멋있는' 모습들이다. 즉 여성 출연자들이 등장하면 흔히 '예쁘다'고 표현하며 그런 모습이 강요되거나 소비되던 예능 프로그램의 틀에 박힌 모습들을 '노는 언니'는 아예 거부한다. 어려서부터 운동으로 다져져 어마어마한 어깨를 가진 정유인은 그런 체격 때문에 놀림을 받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놀림을 받을 일이 아니라 '멋있는 것'이라는 걸 그가 실력을 통해 보여주면서 이젠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그래서 정유인이 오락실에 들어가 펀치머신을 거의 부술 듯이 때리는 장면이나, MT 장소에서 능숙하게 수상스키를 타는 모습은 그토록 멋있을 수가 없다. 늘 여성적인 외모라는 식의 잣대로 평가되곤 하던 차별적 시선을 거둬들이자 이들은 그 자체로 멋있는 존재들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런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구획되는 '나'가 아닌 스스로 당당한 나의 모습은 굳이 여성이니 스포츠인이니 하는 그 특정한 인물군들의 이야기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또한 무언가를 위해 매일 같은 노력하며 살다보니 정작 청춘에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현실 역시 여성 스포츠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그건 우리가 개발시대부터 빠른 성장과 성공을 위해 희생해왔던 삶에 대한 누구나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논다'는 의미는 그래서 일 중심 사회에서 우리가 배제하고 지우곤 했던 놀이의 새삼스런 가치로도 다가온다. '노는 언니'는 그래서 여성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여성들 혹은 스포츠인으로 대변되는 구시대의 한 자락을 경험했던 모든 이들에게 공감 가는 이야기가 된다.

E채널
E채널 '노는 언니' 방송화면 캡처

◆'노는 언니'의 가능성만큼 아쉬운 점

물론 '노는 언니'에 이러한 가능성만큼 아쉬운 점들도 적지 않다. 그것은 첫 회에서 보여줬던 기대감들이 2회에서 게스트로 남성 출연자들을 출연시키고 여지없이 게임을 채워넣는 구태의연한 방식에서 오는 실망감이다. 유세윤, 황광희, 장성규가 갑자기 등장해 마치 옆 캠프에 놀러온 이들처럼 다가와 이들과 합류하는 대목은 새로운 재미보다는 기왕에 만들어진 언니-동생간 케미에 불쑥 끼어든 '불편함'처럼 느껴진 면이 있다. 그래서 박세리는 대놓고 "룰을 잘 모르는구나? 남자 끼는 거 안 좋아해"라고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진 노래방 콘셉트의 게임 같은 것들은 아마도 제작진이 불안감에 채워 넣은 조미료였겠지만 '노는 언니'가 가진 여성 예능으로서의 색다른 시작은 남성 예능이 늘 보여왔던 틀 안으로 다시 집어넣는 아쉬움을 주었다.

아쉬움이 많지만 그래도 '노는 언니'에 거는 기대는 여전하다. 초반이라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해 갈팡질팡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박세리가 출연 계기로 밝힌 그 지점을 늘 염두에 두고 기존 남성 예능이 해왔던 것들과는 다른 새로운 영역을 열어주길 기대한다. 그것은 여성 예능으로서, 또 우리네 예능 전체를 위해서도 중요한 시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