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에 열이 나는 3살 환자가 왔습니다." 눈을 비비며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정신을 차리고 소아응급실로 내려갔다. 지난 8월 21일부터 전공의 파업이 시작되고, 응급실을 비울 수 없어 과장들이 돌아가면 당직을 서고 있다. 오전 1시쯤에 응급실 환자를 정리하고, '이제 더는 안 오겠지?' 라며 잠자리에 들었는데, 2시간도 되지않아 연락이 왔다. 내려가면서 '몸이 예전하고 다르다', '시간 참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18년 전 전공의 1년차 때는 며칠 당직을 서도 체력이 괜찮았는데…. 지금은 하루도 안 지났는데 힘에 부친다.
소아응급실로 가서 진찰을 하고, 보호자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컴퓨터로 기록하는데 어찌나 적어야 할 것이 많은지, 또 손에 익숙하지 않으니 시간이 꽤나 걸렸다. 보호자에게 아기의 상태를 설명하고, 필요한 검사와 수액 처방을 냈다. 그리고 "진찰 상에 큰 문제는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보호자를 안심시켰다. 검사결과 나오기를 기다리며 당직실로 돌아왔다. 두가지 큰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전공의 파업이다. 의사는 환자를 지켜야하고, 환자 곁에서 최선을 다할 때 의사의 힘은 나온다. 당연한 이야기다. 병원을 떠나 파업을 하는 전공의, 전임의 선생님들도 모두 동의 하는 말일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면 전공의 파업은 정당성이 잃는다. 전공의들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조차 없다. 파업이 쉽지 않는 결정이었음에도, 그들이 파업을 하는 이유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다. 관할 부처도, 정부도, 정치인들도. 전공의들이 환자 옆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면, 과연 누가 관심을 기울여줄까? 반박할 수 없는 절대 명제를 근거로, 그들을 비난한다면 대화의 진정성을 신뢰할 수 있을까? 전공의들이 대화에 나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하루 속히 이 사태가 해결되어, 환자들이 어려움없이 지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한다. 전공의들의 의견도 그들의 눈높이에서 들어주었으면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내가 18년전에 응급실 환자를 보던 모습이 겹쳐졌다. 그 때는 왜 그리 바쁘고 일이 많았는지, 무엇이 그리 힘들었는지 한밤 중에 응급실로 오는 아이들, 부모님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조금 참았다가 날이 밝아서 오시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아주 인간적인 생각을 하면서. 자연히 말도 사무적이었던 거 같다. 밤새 아이가 열이 나서 급하게 아이를 안고 응급실에 온 부모님들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 건낼 수도 있었을텐데. '진찰 상에 큰 문제는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는 말 한마디를 그때는 참 하기 힘들었다. 그땐 철도 없었거니와 여유도 없었다.
다행히 검사결과 문제가 없어서, 보호자에게 설명해주고 약을 주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며칠있으면 괜찮을 것'라는 말과 함께. 아이 부모는 연신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사람은 세월이 지나면서 철이 드는 거 같다. '얼마나 힘들면 한밤중에 병원에 왔을까?' 라고 생각하니 아이가 눈에 들어오고, 아이 엄마, 아빠가 눈을 들어온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병보다는 아이들, 그리고 보호자들이 점점 눈에 많이 들어온다. 그만큼 그들에게 따뜻하게 해 줄 말들도 늘어간다.
전공의 파업으로 복잡한 일들이 많았지만, 응급실 당직을 서보니 나 자신을 뒤돌아 보는 시간이 되어 감사하기도 하다. 첫째는 환자들을 위함이고, 둘째는 전공의를 위함이고, 마지막으로는 3주동안 응급실을 보고 있는 나를 위함이다.
이동원 대구파티마병원 소아청소년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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