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뉴스Insight] 여행을 다시 간다는 것,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

지난 8일 오후 경북 경산시 대구대학교 창파도서관에서 책으로 쌓은 크리스마스트리에 학생들이 남긴 새해 소망에 여행 가고 싶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학교 측은 지난 2008년부터 폐기할 도서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어 학생들이 소망을 붙일 수 있게 했다. 올해는 3천 권의 책을 이용해 높이 4m, 폭 3m의 트리를 만들었다. 연합뉴스
지난 8일 오후 경북 경산시 대구대학교 창파도서관에서 책으로 쌓은 크리스마스트리에 학생들이 남긴 새해 소망에 여행 가고 싶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학교 측은 지난 2008년부터 폐기할 도서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어 학생들이 소망을 붙일 수 있게 했다. 올해는 3천 권의 책을 이용해 높이 4m, 폭 3m의 트리를 만들었다. 연합뉴스
김지석 디지털 논설위원
김지석 디지털 논설위원

최근 아내와 집 근처 대형 매장에 생필품을 사러 갔다가 매장 한 켠에 있던 여행사 사무실이 폐쇄된 것을 보았다. 불 꺼진 어두운 사무실 안에는 물품들을 담은 종이상자가 가득 쌓여 창고처럼 변해 있었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여행 상담을 해주던 직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한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며 일상의 행복을 영위하던 직장 동료들이 어느날 뿔뿔이 흩어져 실직과 구직의 터널 속에서 헤매는 것은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해 가을 베트남 다낭에서 만났던 한국인 현지 여행 가이드가 떠올랐다. 30대 후반 무렵의 잘 생긴 남성인 그는 태국에서 여행 가이드로 일하다 한국인 여행객이 급증한 다낭으로 옮겨왔는데 쉬는 날이 드물 정도로 바쁘게 일하던 중이었다. 지금쯤 그는 다낭에서 다른 일을 하며 살거나 오랜 해외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귀국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전에 다녀왔던 홍콩의 한국인 현지 여행 가이드도 궁금해졌다. 40대 중반의 여성으로 똑부러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그녀는 입담이 좋아 여행객 일행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한국인 남편, 자녀들과 함께 홍콩에서 오래 지내 삶의 터전이 안정적으로 보였지만 이후에 홍콩보안법 사태로 관광객이 크게 줄어들고 코로나19 사태까지 덮쳤으니 어려움을 겪고 있으리라 생각됐다.

필자가 다녀 본 해외 여행 중 인상 깊었던 곳은 이탈리아였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전이니 꽤 오래전 여행이다. 당시 업무 출장 중이었던 일행 4명은 주말 휴식을 맞아 행선지로 스위스의 알프스와 이탈리아 도시들을 놓고 갑론을박하다 이탈리아 도시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이탈리아 중부의 피렌체와 피사, 북부의 베네치아, 밀라노,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작은 도시들을 스치듯 여행했다. 이탈리아 여행이야 유서 깊은 역사 유적과 풍광 등으로 가본 사람이든 가보지 않은 사람이든 인기가 많지만, 로마 제국을 경영했던 고대 로마인들과 르네상스 예술의 걸출함 등을 느끼면서 여러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었기에 좋았던 여행으로 남아있다.

코로나19가 3차 확산하면서 정부가 방역 수위를 높이기 위해 3단계 격상을 검토할 지경에 이르렀다. 매일 확진자 규모가 700명~1천명 정도로 심각해 봉쇄 단계를 높여야 할 상황이 되고 말았다. 봉쇄 단계를 올리게 되면 자영업자와 서민의 고통이 커지게 돼 여간 고민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처지에 한가하게도 여행을 입에 올리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지만, 이동의 자유를 억제당하는 여행이 그만큼 절박한 소망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지난 14일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발표한 '포스트 코로나 시대 문화·관광 전망 설문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종식 이후 가장 원하는 여가활동으로 69.6%가 여행을 꼽았다. 국민 2천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이번 조사에서 영화관람 등 문화활동(13.3%), 사교(13.1%), 스포츠(4.1%) 등이 뒤를 이었다. 국내여행을 갈 것이란 응답이 81.1%, 해외여행을 가겠다는 답변은 59.8%로 나타났다.

지난달 하순에는 국내 한 여행업체가 예약금 1만원을 받고 내년 3월 이후 해외여행 예약에 나서자 2주일 동안 1만600여건이 접수돼 화제가 됐다. 이 업체는 여행업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이디어를 짜냈는데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사무실 전화기가 불이 날 정도로 문의가 폭주해 휴직 중이던 직원 30여 명을 출근시켜 업무에 투입해야 했다. 여행 상품 제목은 '희망을 예약하세요. 다시 찾아올 행복을 위해'라는 멋진 문구로 삼았고 놀랄 정도로 예상을 뛰어넘는 대박 결과를 낳았다.

이 업체가 뜻하지 않게 홈런을 날리자 이에 자극받은 국내 최대 여행업체는 내년 5월 이후 출발하는 해외여행 상품을 '2021년'에 맞춰 예약금 2천21원에 내놨다. 내년에 해외여행이 정상화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미리 준비하는 해외여행'이라는 상품명으로 출시했다. 한국관광공사도 코로나19 이후를 대비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 방문 항공권 사전 할인판매에 나섰고 유럽 한 국가의 관광청도 국내 인터넷 유통업체와 손잡고 한국인들을 겨냥해 여행 할인쿠폰을 발행하고 있다.

여행을 다시 하고 싶다는 바램은 이동하고 싶은 자유를 온전히 누리고픈 희망을 담은 것이다. 사람들이 한 국가의 지역에서 지역으로 옮겨 다니고 국경을 넘어 이국의 풍광을 즐기면서 다른 낯선 사람들과 만나는 일은 일상적이면서도 특별하고 때로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 고단한 삶의 여로에서 간혹 누리게 되는, 나무 아래 휴식처럼 달콤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소중한 충전의 기회를 꽤 오랫동안 잡을 수 없었다.

다시 여행할 날을 벼르는 행위는 '보복 소비'(revenge spending)라는 재미있는 단어의 범주에 포함된다. 재난이나 전염병 등 외부 요인으로 인해 움츠렸던 소비가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현상을 '보복 소비'라고 이름 지었는데 그동안 못했던 여행을 복수하듯이 하겠다고 하니 무서운 단어의 재치있는 활용에 슬며시 웃음짓게 되면서 어떠한 갈증과 갈망이 그 단어 안에 담긴 것을 느끼게 된다.

지난 1일 서울시 종로구 조계사 소원의 탑에 한 어린이집 아이들이 붙인 소원지에 가족 여행 가고 싶다는 내용 등이 들어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일 서울시 종로구 조계사 소원의 탑에 한 어린이집 아이들이 붙인 소원지에 가족 여행 가고 싶다는 내용 등이 들어 있다. 연합뉴스

해외 여행을 내년 3월 이후에 하게 될 지, 5월 이후에 하게 될 지, 아니면 더 늦춰지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미국과 유럽의 코로나19 확산이 여전히 심각하고 중국과 한국 등에서도 재확산세가 심상찮을만큼 앞날은 짙은 어둠 속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 등에서 코로나19백신 접종이 시작됐고 우리나라에서도 백신 접종이 예정되어 있어 조금씩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비관적 상황에서 희망을 바라보는 것은 인간 정신의 특권적 요소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웠던 16일 아침에 집이 있는 아파트의 응달진 담장 바깥 거리를 걷다가 작지만 소담스러운 붉은 장미 한송이가 때아니게 피어있는 것을 보았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