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우리 정치사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정당을 옮겨가며 정권 창출에 기여한 행보부터가 특이하며 그때문에 범접할 수 없는 정치적 비중과 존재감을 지닌다. 성격적 특성도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자신감, 유아독존적 사고가 몸에 밴 것처럼 느껴지며 카리스마도 강하게 풍긴다.
그와 비슷한 인물이 뛰어난 책사로 평가받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윤 전 장관이 일선에서 물러나 '정치 원로'가 된 반면에 김 위원장은 팔순의 나이인데도 원기왕성하게 정치 전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노선이 확연히 대비되는 정당인데 김 위원장은 어떻게 이 두 정당을 오갈 수 있었을까? 정당을 갈아탄 경력 때문에 비판받기도 하지만 그를 좀 더 이해해 볼 수는 있겠다. 그는 정치가이가 경제학자로서 색깔이 다른 정당들을 오가면서도 그 안에서 '경제 민주화'로 요약되는 자신의 정책적 신념을 구현할 수 있다고 여긴 것 같다.
건강보험제 도입 기여, 경제 민주화를 규정한 헌법 119조2항 등이 김 위원장의 역할로 이룬 성과인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김 위원장은 '정치 철새'처럼 정치적 이익을 좇아 당을 옮기기보다 정당의 요청과 영입으로 당적을 바꾸면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구현하려 했기 때문에 '경세가'라는 멋진 말로 불리기도 한다.
김 위원장은 최근 당내 논란을 뚫고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법처리된 것과 관련해 사과했다. 그는 "대통령의 잘못은 곧 집권당의 잘못"이라며 "저희 당은 당시 집권 여당으로서 국가를 잘 이끌어가라는 책무를 다하지 못했으며, 통치 권력의 문제를 미리 발견하고 제어하지 못한 무거운 잘못이 있다"고 말했다. '간절한 사죄'와 '통렬한 반성'을 입에 올렸다. 그가 사과를 하자 이를 마땅찮게 여기며 반발하는 분위기가 있으나 긍정적인 여론조사가 나올만큼 성공적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지난 5월 말 4·13 총선 참패로 휘청거리던 미래통합당의 구원투수로 비대위원장직을 맡은 뒤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재벌 규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경제 민주화의 가치를 새 정강·정책에 이식하고, '약자와의 동행'을 강조하며 기본소득 정책도 내놓았다. 당 간판을 미래통합당에서 국민의힘으로 바꾸고, 광주 5·18 민주묘지를 찾아 국민의힘 계열 정당 대표로는 처음으로 추모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문을 낭독하는 이례적 발걸음도 내딛었다.
김 위원장은 또 확장 재정에 의한 추경과 재난지원금 지급, 공정경제 3법과 노동관계법 동시 처리 등을 선제적으로 제안했고 전직 대통령들의 구속에 대한 대국민 사과에도 나섰다. 호남을 홀대했던 과거와 결별을 선언하면서 극우적 주장에 치중하는 '아스팔트 보수'와 선 긋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주홍글씨처럼 남은 '적폐 정당'의 꼬리표를 떼어내고 중도층 지지를 흡수해 재보선 승리와 차기 대선의 승리를 노리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행보는 외로운 전진에 머물고 있다. 그가 '새로운 길'을 함께 가자고 독려하고 있지만, 일부 구성원들이 그의 입장에 동조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보조를 맞추지는 않고 있다. 김 위원장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 어떻게 정치적인 유불리로 작용할 지 주판알만 튕기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오히려 적지 않은 구성원들이 당의 정체정을 흐린다며 그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들의 구속에 대한 사과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이 단적인 예다.
전직 대통령들의 구속에 대한 사과는 진작 했어야 한다고 본다. 옛 친이·친박 계열 일부 의원들이 사과를 일종의 굴복 행위로 해석하며 반발했는데 그렇게 볼 사안이 아니다. 당에서 배출한 전직 대통령들이 커다란 비리와 국정농단으로 구속됐다면 당연히 사과해야 하며 그 시기도 훨씬 빨랐어야 했다. 사과를 비판하는 이들은 김 위원장보다 더 큰 책임감을 느껴야할 이들로 김 위원장에 앞서서 사과에 나섰어야 하는 이들이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인물의 자질을 충분히 살피지 않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에 국정이 잘못되는 데도 제어하지 못했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다.
국민의힘 계열의 보수 정당은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가장 오랜 집권한 정당이지만, 지난 4·15 총선에서 비례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을 합쳐 103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보수 정당 역사상 가장 적은 의석 수로 궤멸적인 참패였다. 2017년 5월에 문재인 정부로 정권이 바뀐 이후 보수 정당의 혁신이 요구됐으나 그렇지 않은 데 따른 결과였다. 김종인 비대위원장 체제의 국민의힘도 달라진 면모를 보이지 못하고 있으니 앞날이 어둡기만 하다.
지금까지 국민의힘은 정부 비판에만 몰두하며 그 비판이 때로 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에 대해 '독주'라는 비판은 적절하지만 '독재'라고까지 비판하는 것은 지나친 표현이다. 민주당이 공수처법 개정에 나서 야당의 비토권을 무산시킨 것은 비판받을 일이지만, 그렇게 된 데에는 공수처법 자체를 반대로 일관한 국민의힘 책임도 있다. 야당의 비판이 '발목잡기'로 치부돼서는 곤란하다.
야당은 정부 비판과 감시가 주된 역할이지만 그 비판이 국민의 공감대를 많이 얻을 수 있도록 제대로 날카로와야 하며 더 나은 정책적 대안을 끊임없이 제시해야 한다. 국민의힘의 정권 비판은 공감하는 부분도 있지만 정권에 대한 증오와 악감정을 드러내며 조장하고 막연한 반감을 부추겨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의도가 많이 읽힌다.
국민의힘의 지지율이 정체 상태에 있다가 최근에야 부동산 가격 폭등, 코로나19 3차 확산 등의 반사이익으로 조금 반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지지기반 확장성이 취약한 것이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김종인 비대위원장과 함께 당을 이끄는 주호영 원내대표의 역할에 아쉬움과 의문부호가 달린다. 주 원내대표는 비교적 합리적인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원내대표로서 대화를 통한 타협 보다는 강경한 대여 투쟁에 치중해왔다. 그 결과 최근 사의를 밝히고도 재신임을 얻을만큼 당내의 확고한 지지를 얻고 있으나 원구성 과정에서 법사위원장직을 얻지 못하자 상임위원장직을 모두 거부하고 공수처에 대한 반대에 뒤이은 공수처법 개정등을 초래한 것은 실착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선명성은 얻었지만 실익은 모두 놓쳤기 때문이다. 당내의 강경한 투쟁 분위기를 헤아릴 수밖에 없었겠지만 지도력은 충분치 않았다. 제1당이지만 의석 수가 작은 현실 속에서 여당과의 협상을 통해 얻어낼 것은 얻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반대만 하다 불가항력이라는 한탄만 해야 했다.
국민의힘은 좀 더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정부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야당으로서의 역할을 재정립하면서 '새로운 길'에 들어서야 미래가 밝아질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더 늦기 전에 혁신의 '새로운 길'에 들어서야 할 때다.
과거에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진보 색채의 민주당을 중도통합의 길로 이끌어 정권을 잡았고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도 '제3의 길'을 제시해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진보적인 색채를 띠기는 했으나 보수적인 면이 적지 않은 정당이었다가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에 이르면서 진보적인 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당내 비주류였던 세력이 주류로 자리잡으면서 자연스레 이뤄진 변화였다.
국민의힘의 변화는 국민의힘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국 정치의 발전을 위해서도 매우 절실한 과제이다. '진보 좌파'라 평가받는 더불어민주당이 변화를 통해 한 축에 자리잡았으면 '보수 우파'인 국민의힘도 혁신을 통해 좀 더 폭넓은 지지를 받아야 대한민국이 좌우의 날개로 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득권에 안주하고 노동자와 서민보다 가진 사람들을 더 위한다는 이미지를 떨쳐내야 한다. 당의 혁신과 지금까지와는 다른 신선한 정책 대안으로 국민에게 다가가야 성취할 수 있는 과제이다.
국민의힘이 '새로운 길'을 가야할 상황이지만, 구태 세력들의 입김이 강해 그렇게 할 것 같지 않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홀로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며 호응하는 이들이 별로 없다. 오세훈, 유승민, 원희룡 등 당내 차기 주자들이 새롭고 강력한 메시지를 내놓아야 하나 그렇지 못하다. 극우적 시각을 걷어내고 좀 더 합리적 보수로 거듭나야 하나 그 과정에서 따르게 될 당내 갈등과 진통을 마주할 용기가 없을런지도 모르겠다.
국민의힘이 '새로운 길'을 가게 되더라도 신뢰도에는 의문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하는 과정에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경제 민주화' 공약을 채택하게 해 성공할 수 있었지만, 집권 이후 '경제 민주화'는 빈 껍데기가 되고 말았다. 약속을 저버린 전력이 있기에 국민의힘이 '새로운 길'을 가게 되더라도 의심의 눈초리는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 위원장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과만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에 대한 진솔한 설명도 할 필요가 있다. 따지고 보면 국민의힘은 '새로운 길'을 가야 하며 그 선택에 대한 진정성까지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에는 너무 떨어진 위치에 있어 지금으로서는 별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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