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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FOCUS]영화 '미나리' 논란, '미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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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나리'가 골든글로브상의 최우수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지명됐다. 골든글로브를 주관하는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는 지난 3일(현지시간) 제78회 골든글로브상 후보작을 발표하면서 '미나리'를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지목했다. 연합뉴스

미국 뉴저지주에 사는 한 지인은 이민간 지 20년이 넘었는데 아직 영어에 능통하지 못하다. 그는 한인 사회 규모가 큰 뉴저지의 한인 상가에서 일하고 한인 교회에 다니며 주로 한국인들과 교류하며 살아간다. 영어를 악착같이 익히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살다보니 그렇게 됐지만 그렇더라도 영어를 더 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는 느끼고 있다.

미국 이민자라 하더라도 한인 사회 테두리 안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 중 영어에 능숙하지 않은 이들이 꽤 된다고 한다. 한국인 뿐만 아니라 멕시코인 등 라틴계가 많은 지역사회에서는 영어보다 스페인어를 많이 사용하고 아시아와 유럽 등지의 다른 국가 출신들 중에서도 영어보다는 모국어에 익숙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영어에 서투른 이민자 출신들은 가끔 적대적인 백인 미국인에게 영어도 할 줄 모르니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는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3일(현지시간) 발표된 제78회 골든글로브상 후보작에서 한국계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 영화 '미나리'가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부문 후보로 지명되자 미국 내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 감독 리 아이작 정(정이삭)이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1980년대 미 아칸소주(州)로 이주해 농장을 일구며 정착하는 한인 가정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뛰어난 작품성으로 화제를 낳았다. 작품 자체가 이미 많은 영화상을 받았으며 출연 배우인 윤여정과 한예리 등도 훌륭한 연기로 수상 트로피를 수두룩하게 받았다.

그래서 '미나리'는 지난해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 등 4관왕을 수상한 '기생충'의 뒤를 이어 올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주요 부문의 상을 받을 것인지 관심을 모으던 터였다. 그러나 골든글로브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분류됨으로써 최고 상인 작품상 수상은 어렵게 됐다. 미국 회사의 미국 자본이 투자됐고 미국인 감독이 만들었는데도 영화 대사가 대부분 한국어로 이뤄졌다 해서 '외국어 영화'로 구분된 것이었다. 골든글로브를 주관하는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는 대화의 50% 이상이 영어가 아닌 경우 외국어 영화로 분류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들은 이를 두고 '바보 같다'거나 '희극적'이라며 비판했다. NYT는 골든글로브를 주관하는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HFPA)가 바보같아 보이는 결정을 했다고 지적했다. NYT는 아메리칸 드림을 추구하는 이민자 가족에 초점을 맞춘 미국 영화가 외국어영화 후보로 경쟁해야만 해 "최고의 상(작품상)을 노려볼 수 없게 됐다"고 꼬집었다. NYT는 또 "'미나리' 출연진은 배우 후보 지명도 받을 만했는데 하나도 받지 못했다"는 점도 덧붙였다.

미국 시사지 타임은 '미나리'가 제외된 것을 두고 "명백하고 당황스러운 무시가 많았다"고 비판했다. 이전에 백인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연출하고 브래드 피트 등이 주연한 '바벨'이 비영어 대사가 주류를 이루지만 골든글로브 작품상을 수상했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 '바스터즈:거친 녀석들'도 비영어 대사가 많았지만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는 것과 대비된다고 꼬집었다. 타임은 "골든글로브의 투표 기반이 외국 언론인이라는 사실이 이 규칙을 더 이상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미국 일간지 LA타임스도 지난해 한국 영화 '기생충'에 작품상 등 4관왕을 안긴 아카데미 시상식과 골든글로브를 비교하며, "'미나리'는 시대에 뒤떨어진 골든글로브 규정보다 더 낫게 대접받을 자격이 있다"고 강조했다. 온라인 매체 인사이더는 "골든글러브가 후보작 명단에 영화의 출신 국가를 써놓으면서 상황은 훨씬 더 희극적이 됐다"며 "'미나리' 밑에는 '미국'이라고 나온다"고 비꼬았다. 연예전문지 엔터테인먼트도 "더 큰 충격은 여우조연상 부문의 가장 유력한 수상 후보로 여겨졌던 윤여정이 조디 포스터의 깜짝 지명을 위해 빠졌다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러한 결정은 인종 차별 논란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 영화사인 브래드 피트의 '플랜B'가 제작하고, 미국인 감독이 연출하면서 미국인 배우(한국계인 스티브 연 등)들이 출연한 영화를 외국어영화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냐는 것이다. 지난해 중국 이민자 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 '페어웰'도 외국어영화상 후보작으로 분류됐는데 '미나리'마저 그러한 취급을 받는 것이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차별이란 비판이 제기된다. 지난해에도 '페어웰'의 룰루 왕 감독 등 영화인들의 지적이 이어지고 워싱턴포스트 등도 비판 칼럼을 실은 적이 있다.

이와 관련, 유명 작가이자 퓰리처상 수상자인 베트남계 미국인 비엣 타인 응우옌은 지난달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칼럼에서 "언어가 '외국적'의 기준이 된다는 주장은 미국에서 백인에게 사실일 수 있지만, 아시아계는 영어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외국인으로 인식되는 듯하다"며 이 영화가 '미국적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른 경우를 살펴보자. 2017년 전미도서상 최종후보작에 오른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의 작품 '파친코'는 '미나리'와는 정반대의 사례이다. 이 작품은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4대에 걸친 한국인 가족의 이야기를 유려한 영어 문장으로 썼다. 재일 한국인의 고달픈 삶과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지내야 하는 작가의 경험도 투영됐다. 이 뛰어난 작품은 출간 직후 열광적 반응을 일으켜 미국 문단과 평단의 격찬을 이끌어냈고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작가의 모국인 한국과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도 번역·출간돼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은 미국과는 관련 없는 한국인들의 이야기였지만, 미국인들은 미국 도서로 여겼고 전미도서상 최종후보작에 올랐던 것이다.

이민진 작가는 서울에서 태어나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 간 1.5세 재미교포이다. 뉴욕에서 자랄 때 인종적 편견에 시달려야 했고 자신이 속한 한국계는 물론 다른 아시아 국가 출신 미국인들이 결코 미국 주류사회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파친코'가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후 '제2의 제인 오스틴'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는 미국의 대학 등에 강연을 다니면서 미국인들이 자신의 작품을 읽고 한국과 한국인들의 슬프면서도 강인한 역사를 알게 되고 이해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매우 유창한 영어로 "미국의 지식인들이 앞으로는 한국어를 좀 더 알아야 되는 게 아니냐"는 농담도 했다.

미국은 다인종·다민족 국가로 이민자들이 고유의 문화를 지키면서도 미국 문화에 동화되는 '멜팅 팟(melting pot) 사회'를 지향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백인과 흑인의 인종 갈등이 있으며 아시아계는 주변부에 머무르면서 때로는 인종 혐오에 시달리기도 한다. 최근에는 인종 갈등이 심해져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면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통합'에 안간힘을 다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미나리' 논란에서 보듯 통합을 위해 다양한 문화를 용광로처럼 녹여낸다 해도 백인 주류사회의 언어인 영어가 미국적인 것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이 넓은 품을 지닌 사회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편협성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양식 있는 미국 언론과 지식인들의 비판이 그나마 미국 사회의 건강성을 드러내며 앞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촉매가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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